봉우리가 크고 향기로워 바다 건너 상인들에게 없어서 못 팔 정도라고 하니 말 그대로 만사형통萬事亨通입니다.
기분이 어떤가요. 여명?
열불이 끓어오르나요. 아니면 맥이 죽 빠지나요.
여명:(이 복잡한 감정을 무어라 정의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래도 확실한 건 좋은 쪽의 감정은 아니라는 것일 터.) 그... 간택령 말고 다른 할 말은 없는 것인가...?
그 말을 들은 대신들이 이 초 침묵합니다.
간택령을 내려주시옵소서...!
...전혀 듣고 있지 않는 것 같네요. 재차 우렁찬 소리가 울려퍼집니다.
여명:...... (제발)
그때, 당신의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이가 말을 건넵니다.
연화:이 소리도 이젠 지겹지 않으십니까 폐하.
여느 때처럼 무미건조한 낯의 연화입니다.
여명:아, 자네! (눈에 띄게 표정이 밝아진다. 최대한 남들과 비슷하게 대우하려 했으나 그 노력이 보일지는 모르겠다.) 아, 그래. 확실히 지겹기는 하구나.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똑같은 소리만 하고 있으니 내가 편히 잠들 날이 없어. (그리 말하며 번지는 웃음을 참는 그의 표정은 오히려 그 말에 신뢰를 떨어트릴 것이다...)
연화:(그 각고의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내 무표정한 낯으로 일관한다. 이어진 말에 꼿꼿이 세웠던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인다.) 그렇다면 간택령을 내리심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리한다면 신하들의 지겨운 간언을 듣지 않아도 될 텐데요.
연화가 말이 올린지 채 삼 초가 안 되었을지언데 또 한 번 큰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간택령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래요, 정 지쳤다면 어때요? 이번에는 간택령을 내리고 연화가 아닌 다른 이를 황후를 들일 생각이 있나요?
여명:(절대. 그럴 일은 없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없다!) (...칼이 들어온다면 고민은 좀 해보겠네.)
목숨의 무게를 아는 훌륭한 황제군요.
그렇습니다. 태양 빛은 꺾이는 길 없이 비추고자 한 대상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기에 태양으로 칭해지는 이 나라의 황제인 여명이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은 그 사람이 아니라면 도저히 옆자리를 허락할 수 없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아직도 끈질기게 간택령을 내리라 늘어지는 대신들을 설득하는 수밖에요!
여명:으음, 다들 무엇이 그리 급한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드네. 내가 즉위한지 아직 7년밖에 되지 않았던가?
폐하, 본래 황태자에게는 재학이 지나자마자 황태자비를 들이는 것이 나라의 안정과 금술을 위해 당연스럽게 거쳐야 했던 일이 아닙니까. 폐하께서는 약관을 넘기신지 오래이니 하루빨리 간택령을 내리셔야 하옵니다...!!
여명:어허! 그것과 이 상황은 별개가 아닌가!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내 나이가 이립이 넘더라도 국혼을 할 생각이 없네! (연화가 아니라면 말이야.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덧붙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암! 그렇고말고!) 그리고 아직은 때가 아니지 않은가. 민심이 흔들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왜들 그리 국혼을 서두른단 말인가? 그대는 이 나라가 뒤흔들리길 바라는가?
황후의 자리가 공석인 것은 본래 두 개여야 하는 나라의 뿌리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사옵니까. 황후는 내외명부를 총괄하며 국가의 행사도 추진하는 국모의 자리이옵니다. 현재 재상께서 틈틈이 일을 처리하시고는 계시나, 황후가 없는 백성은 어미 없는 아이와 마찬가지이옵니다. 어찌 이를 방치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폐하아... 게다가 이 일을 언제까지나 재상께서 도맡아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옵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은 연화에게 내외명부의 일을 도맡아 시키고 있습니다.
내명부는 본래 황제의 반려가 맡는 것이 당연하기에 연화는 기겁하며 거절했지만, 여명의 지속적인 권유에 못 이기는 척 받아 해결해주고 있습니다.
그 명령에는 안 그런 척 나의 황후는 연화 한 사람뿐이라는 정치적인 사심이 조금 섞여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여명:(아니 근데 왜! 왜들 이러는 건가! 왜애! 당장이라도 따져 묻 고싶은 심정이었으나 필사적으로 참았다. 연화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더냐...) 큼. 크흠! ...아직까지는 괜찮지 않으냐. 재상이 부족함 없이 해주어 나 또한 국혼을 늦추고 이리 나라에 힘쓰고 있는 것 아니더냐?
재상이 뛰어난 것은 맞으나, 최근 들어 몸에 쉽게 오한이 드시고 쉬이 피로해 하시는 것을 보아 과로로 인한 몸의 병마가 틀림없사옵니다. 유능한 재상을 이런 일로 잃는 것은 너무나 아쉽지 않겠사옵니까.
여명:으음. 그렇... 아니, 무어라? 재상의 몸이 좋지 않다고?!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느냐! 의원은? 의원은 불렀느냐? 뭐라 하더냐!! 심각한 건...... (그의 낯빛이 죽어가고 있었다...)
당신의 말이 끝맺어지고 좌의정이 입을 열 즈음에...
연화:제가 한마디 해도 괜찮겠습니까.
그 한마디의 시끄럽던 내전의 분위기가 찬물을 맞은 듯 조용해집니다.
아. 맞아요. 잠시 감정이 격해져 잊고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부채로 얼굴 하관을 가리고 있으나, 긴 속눈썹이 음영을 만들어 인상이 조금 피로해 보이는, 가지런하게 올려묶은 머리카락이 몇 가닥 결 좋게 흘러내린...
당신의 책사이자 이 나라의 재상, 연화입니다.
얼굴 하관을 가리고 있던 접선이 능숙한 손길로 바로 접힙니다.
동시에 자신에게로 집중된 시선에도 여유를 잃지않은 연화가 그린듯한 미소를 지어낸 뒤 느릿하게 말을 시작합니다.
연화:비록 때가 늦었다고는 하나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었습니까. 폐하께서도 생각이 있으실 테니 좌의정께서는 걱정을 거두시죠. 거기에 조만간 화성에서 사절단이 오는 만큼 이 문제는 조금 더 미뤄두는 게 어떠십니까.
여명:(내 편을 들어주는 건가?) (올망올망)
연화:(ㅍ.ㅍ)
좌의정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하지만 결국 기세가 꺾여 주춤거립니다.
황제와 가장 가까운 재상에게 함부로 말했다가 무슨 화를 당할까 두려운 모양이에요.
적어도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 사람인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하긴, 그것도 알지 못하면 어떻게 좌의정에 자리에 올라왔을까요.
그렇다면 지금입니다. 쐐기를 박아볼까요? 난 이 결혼 반댈세!
여명:크흠, 큼! 재상의 말이 옳아. 그렇고말고! 그러니 경들은 한동안 내 앞에서 간택령의 기역 자도 꺼내지 말게! 알겠나?!
당신이 단단하게 쐐기를 박자. 결국 좌의정이 헛기침과 함께 황명을 받든다는 말과 남기며 고개를 숙입니다.
기진맥진한 숨을 목구멍 아래로 넘깁시다. 내 임이 보고 있는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면 안 되죠!
여명:(후우, 깊이 숨을 내쉬고 올곧은 눈빛으로 좌의정을 바라본다.)
좌의정이 더욱 고개를 푹 숙입니다. 당신의 카리스마에 압도된 듯한 모습이지요!
생각난 김에 연화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다시금 펼쳐진 접선으로 얼굴 하관을 가리고 대신들을 지켜보던 이가 시선을 느낀 것인지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자 총기가 가득 서린 눈동자 위로 여명이 오롯이 담깁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만한 선을 그리며 눈이 휘어집니다.
해산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신하들이 인사를 올린 뒤 해산합니다. 그리고, 연화 역시도 자리를 뜨려는지 당신을 향해 짧게 묵례합니다.
여명:아, 자네! (자리를 뜨려는 당신에 일단 불러세웠다. 더 보고 싶은데...) 저기, 그... ...아! 몸이 안 좋다던데. 괜찮은가? (올망올망)
연화:(말 사이사이의 공백에도 가만 귀를 기울였다. 제 주군이 건네는 다정한 걱정에 문득 웃음이 새었으나 펼친 부채 뒤에 가려져 숨겨졌으리라. 느릿이 말을 잇는다.) 괜찮습니다. 그 말이 신경 쓰이시거든 그저 폐하를 설득해 보려는 간신들의 속살거림이라 치부하십시오. (올망한 시선이 이 초 옮겨붙는 것을 마주했을까, 부채 접어 한 손에 쥔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셨으니 제 얼굴만 보아도 병색의 유무 정도는 구분하실 수 있겠지요. (마음껏 보고 판단해 보라는 양 성큼 다가가 둘 사이 간극을 제 보폭만큼만 좁힌다.)
여명:(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티를 내지는 않았다. 혹여나 당신에게 부담이 될까 말이다.)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그런 것이겠지만...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것이 있지 않은가?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질 않아 우물쭈물하던 때였다. 으아. 아, 아니...! 갑자기 좁혀진 거리에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이게 무슨... 무슨 상황이지?) 벼, 병색... ...그래! (머리를 빠르게 굴리며 상황을 이해하긴 했으나... 삑사리가 난다. 그의 얼굴이 더욱 새빨개진다.) 크흐흠! 어... 괜찮아 보이는구나...... (말은 그리하면서도, 막상 당신의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안색이 좋지 못해 보일 정도다.)
연화:(부끄러워하는 아기 쥐 같구나. 서양에는 그러한 쥐들을 햄스터라고도 부른다지. 아니, 햄이었나? 되지도 않는 생각들을 나열하다 입을 떼었을 즈음 문득 시선을 문 쪽으로 돌린다.)
우당탕탕!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내관이 급한 일이 생겼다며 연화를 이끕니다.
막을 생각으로 손을 뻗어보면... 이런, 벌써 저 멀리 가고 있네요.
더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남지만, 괜찮습니다. 우리에겐 내일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매화가 피어나 백성들도 겨울과 봄의 구별을 잘하질 못한다니 이해하지 못할 실수는 아닙니다.
따뜻한 걸 내오라고 해야겠네요.
여명:날이 차구나. 여봐라, 재상의 몸에 한기가 들어 고뿔이라도 들까 걱정이다. 무언가 몸을 녹일만한 걸 내올 수 있겠느냐?
분주하게 궁인들이 술상을 내옵니다.
그 말에 고개를 깊이 숙여 준비하겠다고 한 상궁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당신의 곁에 놋쇠 화로를 가져옵니다.
정말 이러면 춥지 않겠어요.
여명:연화와 이리 담소를 나누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자, 한 잔 받겠나? 술병을 들며 말갛게 웃어 보인다.)
연화:(그 술병 가만 바라보다가 난처한 듯 고개를 작게 젓는다.) 송구하오나 소인은 매화주를 마실 수 없습니다 폐하. ...대신, 제가 구해온 귀한 술이 있으니 이를 한 잔 올려도 괜찮겠나이까.
여명:자네가 주는 것이라면. (망설임 없이 술병을 내려놓고 잔을 내민다. 혹여 내가 추태를 부리더라도 모르는 척해주게나. 농을 던지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런데... 벗으로써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연화:(상 아래에서 술병을 꺼내 여명이 내민 잔을 조심히 채운다.) 감홍로라고 하는 술이옵니다. 조선의 최고의 명주라 불리며, 장기간 한약재와 함께 숙성하고 있기에 건강에도 좋다 하더이다. (이어진 물음에는 짧게 침묵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재는 눈동자에 드물게도 혼란이 들어찼다. 이내 시선 내리깔고는 말을 잇는다.) 예. 이리 뵙기를 청한 것은 오랜만에 벗으로서 마주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었던 탓도 큽니다. ...일주일 뒤, 화성에서 사절단이 오기로 예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절단을 환영하는 거대한 야시장이 열릴 터지요. (겨우 운을 떼고는 힐끔 푸른 눈동자 굴려 널 응망한다.)
여명:(제 잔에 술이 채워지는 걸 가만히 응시한다. 길어지는 침묵에 조용히 잔을 비우고, 다른 잔을 꺼내 당신의 앞에 놓았다. 말은 꺼내지 않았다. 재촉으로 느껴질까 봐.) 으음, 그랬지. 사절단이 머무는 기간 동안 매번 열리던 것이 아닌가. 딱히 이상할 건 없지. (헌데 그것은 왜? 고개를 기울였다.)
연화:(이제는 익숙함마저 묻어나는 일련의 언행을 보고 있자면 내가 네 다정을 좀먹고 이리도 컸던가, 느끼곤 했다. 어릴 적부터 너에 길들여진 저는 기꺼이 그 배려를 받아들였다. 빈 잔을 채워달라는 의지 표명으로서 빈 잔을 느릿이 네 쪽으로 기울인다.) 본래 이는 내명부의 일이고 황후가 준비해야 하는 일이지만, 황후가 없는 지금 내명부의 일은 저의 책임임을 알고 계시겠지요. 때문에 몇 달간 이 일에 매달렸습니다. 대신들도, 그리고 저도 말입니다. 저희는 이틀 동안 열리는 야시장 이후 사흘째가 되는 날 궁궐 연회를 계획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걸 이미 아실 텝니다만. (이 초 침묵. 어렵사리 입을 뗀다.) 궁궐 연회는 당신께서 황제가 된 이후 처음으로 다른 이를 불러들이는 연회이니 더욱 화려하게 열 생각입니다. 당연히 야시장에도 많은 사람이 참석하겠지요. 대신들이... 그리고 제가 노린 것은 바로 그 점입니다. (여느 때처럼 고개를 꼿꼿이 세운다. 이내 옅은 취기가 도는 새파란 눈동자를 또릿이 치켜떴다. 올곧은 시선은 술잔을 지나, 그리고 그에 고인 제 미련함을 지나 이내 사랑해 마지않는 주군의 낯에까지 닿았다. 너는 제 이 말을 어찌 받아들일까. 답지 않은 긴장감에 일순 주먹을 꾹 말아 쥐었더랬다.) 저는 이번 야시장에서 폐하께 반려를 찾아드리고자 합니다.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폐하를 보필할 예정이니까요. 몇몇 호위무사들을 백성으로 위장시켜 따르게 할 계획이니 폐하의 목숨이 위험해질 일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여명:...연화는 정말로, 내가 반려를 찾길 원하는가? (당신의 말을 듣는 동안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의문부터 당황까지. 마지막에 떠오른 감정은 무엇인가. 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제 입에 물었다. 같은 궁에 있어도 보기 힘든 얼굴이다. 제 감정을 전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한두개가 아니다. 보필? 좋다. 물론 좋다. 다만 그것은 제 반려를 찾지 않았을 때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이 제 곁에서 보필하는 것을 대가로, 너무 많은 걸 내어주는 게 아닌가.) ...못 들은 걸로 하지. 그건... ...그건 싫어.
연화:나라의 신하 된 자로서 어찌 폐하의 국혼을 바라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혹여나 제가 그를 바라지 않는다 의심되신다면 그것은 충분한 신의를 드리지 못했던 불충한 신의 잘못일 테지요. 부디 저를 용서치 마시고 엄벌에 처해주십시오. (심장을 아프게 찌르는 말들의 나열이다. 누구를 노리는지도 뚜렷하지 않은 말에 상처 입은 마음은 희뿌연 통증으로서 당초의 목적의식을 흐렸다. 심장에 짙게 고인 후회와 자괴감만이 오롯이 존재하며 박동한다... 혹여나 이 마음 한 자락 새어나갈까 손바닥으로 가슴께를 억세게 내리누르며 말을 이었다.) ...정 원하시는 사람이 없다면 찾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축제가 끝난 이후에는 간택령을 내리시지요.
여명:(침음을 삼키며 한참 동안을 침묵했다. 입을 열었다가는 그것을 저도 모르게 흘릴 것만 같아서, 도저히 입을 열 수 없던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정정해야 할지 감조차 잡기 어려웠다. 아니. 정정이 가능은 할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반려로 삼고 싶은 사람은 당신이라는 걸 말할 수 있을까.) 만약... 내 국혼이, 나를 불행하게 하더라도? 그리되더라도 자네는 내가 국혼을 하길 바라나? (이 말이 최선이었다. 제 입장은 적당히 알리며 당신의 견해를 들을 수 있는 질문이니 말이다. 만약 당신이... 긍정의 대답을 내놓는다면? 제 머릿속에 스미는 목소리들을 필사적으로 무시하며 그가 웃었다. 환히, 아주 환히. 떨리는 목소리가 볼품없어 보임에도, 억지로 웃는 그가 가련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미소는 지독히도 그와 어울렸다.)
연화:(입을 굳게 다물었다. 나는 너로 이루어졌고, 너 또한 나로 이루어졌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미 서로가 내뱉을 답을 알고 있었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기에 더욱 잔혹한 질문이었다.) ... (빈 잔을 소리 나지 않게 탁자에 도로 올리었다. 자신의 충의가 네게 불행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이 못내 우습고 서러웠다. 무표정한 낯에는 어느새 사람다운 온기가 서리었고 겨우 긁어 내는 목소리는 볼품없었으나 당신은 이 설화국을 이끌어가는 황제요, 세상에 둘도 없는 제 친우이니. 당신이 황제로서 잘 되는 길이 곧 제 친우를 행복으로 이끄는 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황제로서의 위치를... 고려하십시오 폐하. ...이미 숱하게 가르쳐드렸던 내용입니다. 한 개체로서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이제 버릴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결국에는 그 속에서도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뒷말은 끝내 내뱉지 못했다. 확신 없는 말이 혀뿌리에 치이고, 떨궈진 시선은 진창을 구른다. 고집스럽게도 앙다문 입에서는 숨소리 하나 새어 나가지 않았다.)
여명:그래, 그렇구나...... (중얼거리듯 대답한 그는 당신의 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그의 미소에는 당신에 대한 믿음이 깃들어 있었고, 제 술잔을 비우는 그의 행동에는 우리에 대한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진심이라 보기도 어려웠다. 그는 그저 현실 도피를 하고 있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부정하고 허황됨을 꿈꾸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불이 붙은 도화선을 쥐고 있지 않은가.) 연화, 자네는 똑똑해. 그리고 총명하지. 내 못난 부분을 굽어살펴 주는 것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그가 억지로 환한 미소를 유지했다. 그것은 무너지지 않기 위한 발악이었다. 연모한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그 문장을 제 입에서 소리 없이 굴려보았다. 다만 그것은 언어의 형태로 완성될 수 없었다. 그의 얼굴 위에 희미한 슬픔이 덧칠해졌다. 마음껏 내뱉고 싶어도 못내 그럴 수 없는 제 처지가 원망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번에도, 침묵을 제 입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주변에 내려앉은 고요가 어색해질 정도로 말이다.) ...날이 차구나. 슬슬... (작은 뜸을 들였다. 웃음소리와 유사한 형태의 숨을 토해낼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뜸을) 들어가 보는 게 어떤가.
연화:(그 미소를 가만 바라보고 있자면 꼭 자신이 죄인이 된듯한 느낌이 들었다. 폐부를 짓누르는 이기심과 죄책감을 잇새로 가늘게 뱉어냈다. 딱 제가 덜어낸 감정의 무게만큼 뭉근히 피어오르는 흰 숨을 바라보다 느리게 허리를 굽혔다.) 그리하겠습니다. (허나 후에 가만 고개 들어 벽안 가득 네 상을 담자면, 문득 궁금증이 피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무례를 무릅쓰고 여쭙니다, 폐하께선 대체 누구와 가약을 맺고 싶으신 겁니까... 입안에서 빙빙 도는 말을 끝내 꺼내지는 않았다. 이제는 차디찬 달밤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절한 배경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물론 국법상 무화는 처리하는것이 옳지만 고작 이런 걸로(라기에는 죽을뻔했지만) 무화를 처형시키기에 그는 너무 아까운 인재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저렇게 사람을 넝마로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닐테니까요.
시체를 다시 눈에 담으면 등골을 타고 소름이 머리끝까지 올라옵니다.
연화:(잠시 무화를 바라보던 시선 돌려 여명과 눈 맞춘다.) 폐하. 자객이 더 있을지 모르니 우선 오늘은 그를 벌하지 마시고 폐하를 지키게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여명:(연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키지 못했다고 해봤자 작은 생채기뿐이지 않으냐. 너야말로 다친 곳은 없느냐?
연화:(칼을 갈무리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일순 귀를 막았을까, 끝자락의 물음만이 들렸던 것인지 느리게 입 열어 답한다.) 무사합니다. (이내 무화에게로 일 초 시선 주었다가.) 폐하, 강녕전까지는 제가 모셔도 괜찮겠습니까?
여명:(놀란 듯 당신에게 시선을 두더니, 이내 무희의 눈치를 조금 살폈다.) ...괜찮겠는가? 오늘같이 위험한 일이 다시 발생할 수 있는데도?
연화:(하늘색 눈동자가 멀리 돌아 다시 제게로 돌아오는 네 시선을 올곧게 좇아간다. 담담한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위험을 따지기에 앞서 부디 당신의 신하인 저를 좀 더 부릴 생각부터 하십시오. 제가 당신을 지키는 일은 천하에 당신보다 더한 귀인은 없으므로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혹시 제가 두렵다 하면 곁을 맡기지 않을 작정이셨습니까 폐하.
여명:(부디 당신의 신하인 저를 좀 더 부릴 생각부터 하십시오. 그 말에 서운한 감정이 앞선다. 당신은 진정으로 제 마음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나에게 있어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당신은 정말로 모르고 있는 것일까. 충성이라는 그 말이 나를 더 아프게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차라리 당신이 좀 더 이기적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래, 안다. 알고 있다. 내가 이 나라의 왕이고 당신은 나를 보필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 정도는.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두렵다고 하면 어쩔 셈이냐. 네가 위험한 것이, 네가 다치는 것이 내가 죽는 것보다 더 두렵다고 한다면! (언성이 높아졌다. 당신 때문이 아니었다. 저 스스로 행동할 수 없는, 자신의 위치와 무능력함에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연화:(거진 처음 듣는 호통에 눈에 띄게 움직임이 굳는다. 날카롭던 눈매가 찬찬히 둥글어지고 앙다물었던 입술은 작은 틈을 낸다. 그 사이로 가느다란 호흡이 새더만 찬 밤공기 사이사이에 섞여 흩어졌다. 너는 대체 자신이 무어라고 이리도 화를 내나. 그 답을 찾지 못하니 나는 줄곧 네게 같은 말만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군주로서의 위치를 자각하십시오, 모두의 위에서 그들을 굽어살피십시오, 그 무엇보다 당신을 우선시하십시오... 허나 이번에도 무용지물이었을 뿐이라니. 당신과 내 이 방황이 누구보다도 당신의 행복을 바라고, 그 방식이 당신이 성군으로 이름을 날리는 것이라 확신한 저의 오산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처음으로 작은 파문이 일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뱉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당신은 너무나 다정해 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보살필 줄 알았으며, 또 한결같았으므로 여전히 나를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굽어살핀다. 그런 당신이 어찌 어린 시절의 사사로운 정을 쉬이 버릴 수 있겠는가? 머리로는 알고 있던 진실이긴 하나 이를 재확인하자 머리가 차게 식었다. 꾹 말아 쥔 주먹이 하얗게 질려간다.) 피곤하신 듯하니 이만 궁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폐하.
여명:(그는 곧바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을 알 수 없었기에, 그저 눈을 감고 침묵을 택할 뿐이었다. 농담 같으냐, 목구멍에 치미는 그 질문은 삼켰다. 당신이라면 내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을 터이니.) 아무래도 나는 아직 치기 어린 아해인가 보구나. (결국, 그는 인정을 택했다. 그것의 진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저 자신이 인정하면 될 일이었다. 합리화라 해도 상관없다. 그저 내가 좀 더 못난 황제가 되면 그만이다. 당신을 탓할 바에 그 화살을 내게 돌리면 그만이다.) 소란을 피워 미안하구나. 네 말대로... 피곤한 것 같으니 어서 돌아가서 잠을 청해야겠어. (이미 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언제까지 회피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회피밖에 할 수 없다. 여태까지 해 온 것 그것밖에 없으니, 다른 방법 따위 알 턱이 있나. 진정 본인이 황제라는 위치에 어울리는 인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강녕전
강녕전의 주위로 조금 전보다 몇 곱절은 더 많은 이들이 보초를 서고, 무화는 죽은 자객의 시체와 아직은 살아있는 이를 데려가 옥에 가두기 위해 물러났습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황제의 처소에는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연화만이 남아있습니다.
조금 전 사람의 목숨을 끊어낸 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고요한 낯의 연화입니다.
연화:남은 자객들은 어찌 처분하실 계획입니까.
여명:글쎄, 우선 배후를 물어야 하지 않겠나. 회유를 하든 고문을 하든. 그다음에는 확실히 처형해야겠고...
연화:예. 배후를 찾는 게 우선이지요. ...혀만 붙어있다면 무언가를 말하는 데 문제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른다고 잡아떼는 이들은 혀와 생존을 제외한 다른 곳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뽑고 자르다 보면 언젠가는 기억이 날 테고요. (대표적으로 눈이라든가. 그리 제안하는 목소리는 새벽 호수와 같았다.) 폐하를 상처 입힌 이는 제가 순간의 감정을 못 이겨 너무 쉽게 보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여명:그렇지. 혀만 붙어있다면 무언가를 말하는 데 문제는 없으니... (현명한 대답에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연화는 소매 안에서 입을 앙 다물고 있는 조개껍데기 하나를 꺼냅니다.
껍데기를 열면 조금 고약한 냄새의 연고가 담겨있습니다.
연화는 습관처럼 여명의 상처 부위를 붙잡고 연고를 발라줍니다.
황제에 오르기 전 생채기가 난다면 연화가 이렇게 돌봐주었었죠. 그때 들인 습관 같습니다.
연화는 연고를 반쯤 바르다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물러납니다.
여명이 예전의 여명이 아니라는 걸 자각한 듯싶네요.
여명:(의아한 듯 두 눈을 끔뻑이더니 찬찬히 입을 열었다.) ...왜 그러나? 마저 해주지 않고.
연화:(힐끗 여명을 보았다가 이내 한결 조심스러워진 손길로 치료를 마친다.) 밤늦은 시간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날이 밝는 즉시 어의를 부르겠습니다.
이따금 연화가 전해준 책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숨을 쉬는 것이, 그 책이 결코 평범한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명:...영상. (슬며시 인기척을 드러내 다가간다.)
그 책, 무언가.
최덕하:폐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가벼이 숙인다. 이내 제 손에 들린 책을 힐끔 바라본다.) 사특한 생각을 품고 있는 이들의 약점과 앞으로 이 나라에 필요한 부분을 정리한 문서입니다. 재상은 이를 장부라 부르더군요. 재상이 은퇴하여 잠적한 다음 폐하께 제가 건네기로 하였습니다.
여명:...은퇴? 잠적? (얼굴을 굳힌다. 누가, 뭘 한다고?) 지금 재상이 잠적할 것이다, 그리 말했나?
최덕하:예. 재상은 현재 은퇴를 계획 중입니다. 폐하께서 국혼을 올리든 올리지 않든 이번 사절단이 돌아간다면 모든 작위를 버리고 떠날 것이라 말하더군요.
여명:(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인즉슨 처음부터 관직을 내려놓을 생각이라는 게 아닌가. 왜? 왜지? 일이 너무 많았나? 아니라면, 내가 너무 철없이 굴었나? 내가... 싫어진 건가?) 더, 더 아는 건 없나? 전부 말하게.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최덕하:(그 낯이 간절하게 보인 건 왜일까. 때문에 드물게도 먼저 입을 열어 제가 아는 한 모든 정보들을 담담히 나열해갔다.) 재상이 폐하의 국혼을 바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당신의 감정 역시 중요하다 생각하지요. 결혼을 언급한 것은 떠나기 전 적당한 명분을 만들려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잠시 시선을 여명의 낯에 두었다. 이내 부드러이 내리깔며 말을 잇는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이미 연화 그 아이를 마음에 품으셨지 않습니까? 이 늙은이 눈에는 다 보이는 것을 그 아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폐하를 위해 그를 설득해 보았지만 도통 듣지를 않습니다. 새로운 정인이 생겼다기에는 행동에 미련이 남아있는데 말입니다. (이내 제 턱을 느리게 쓸었다.) 마지막으로 확실한 건... 그 아이가 이번 야시장에서 폐하를 자신이 정한 이와 함께 두기 위해 노력할 거라는 사실이겠지요. 소신이 아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대화가 끝났다는 듯, 영의정은 한참 정보를 쏟아낸 후에 입을 다뭅니다.
두 사람의 고요한 발소리는 어느새 도착한 청화문 앞에서 멈춥니다.
자객으로도 모자라 갑작스럽게 사라진 황제에 발칵 뒤집힌 궁궐의 호위무사들과 내관들이 여명을 이끌기 전, 영의정은 연화가 작성한 친필문서, 즉 장부를 건냅니다.
최덕하:그 아이가 작성한 친필문서입니다. 그 아이의 은퇴 이후 건네겠다 약조하였습니다만, 돌고 돌아 결국 폐하께 도달할 것이라면 지금 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되어 바치겠나이다.
당신은 그 장부를 받아들였나요? 아니면 거절했나요? 어떤 생각을 하며 방에 도착했나요?
침상에 누워 문서를 바라보면 친필문서는 하루 이틀 동안 완성한 것이 아닌 듯 종이의 질감은 손때를 타 부드러우며 글씨체는 섬세하고 반듯합니다.
연화:(알 수 없는 이에게 다정히 팔짱을 끼며 머리를 기댄다.) 그럼 저희는 이만 식을 올리러 가보겠습니다 폐하. 만수무강하시길.
여명:여, 연화아아...
아니, 안된다! 불허한다! 안 돼! 절대 안 돼!
한참 부정의 답을 쏟아내고 있자면, 한순간 주위가 변합니다.
처음 보는 곳입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고소한 향기가 풍겨오고. 탁자 같은 것이 가득 모여있으며 여명이 앉은 탁자의 건너편에는 처음 보는 차림의 연화가 원망과 경멸이 가득한 눈으로 여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연화:당신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
그렇게 소리친 연화는 투명한 잔에 담긴 물을 여명에게 냅다 부워 버립니다.
물에서는 뜬금없이 창포의 향이 납니다.
여명:왜, 왜...? 나 아무것도 안 했는, 으아악!
잘 손질했던 머리카락이 폭삭 가라앉고... 얼굴선을 따라 턱에서 방울져 손등 위로 똑 떨어집니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다 보면 자연스레 깨닫게 됩니다. 아니. 오래전에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네요.
......
아... 개꿈이구나......
여명은 꿈에서 깨어납니다.
욕을 중얼거렸나요?
그랬다면 금방 후회할 거예요. 부채를 펼치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으니까요.
독특한 향과 함께 여명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얼굴에서 채 마르지 못한 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눈물인가요? 아뇨. 코끝에 맴도는 향의 정체는 창포입니다.
연화:악몽이라도 꾸시는 것 같다고 궁녀가 뛰어와 머리조차 올리지 못한 채 달려왔더니...
부채가 얼굴 하관을 가리고 있어 피로에 가라앉은 살얼음 같은 시선만이 섬짓한 연화의 말이 사실인 듯, 그의 머리카락은 길게 풀어헤쳐져 있습니다.
연화:꿈에서 경연이라도 하셨습니까. 제 이름을 그리 애달프게 부르시는 건 처음 듣는지라.
여명:...연화아아. (울상을 짓더니 자리에서 비척비척 일어난다.)
이번에는 꿈이 아닌게지? 현실 맞지? (양팔을 벌리고 당신에게로 다가간다. 안아달라는 듯...)
연화:예, 연화입니다. (무뚝뚝한 낯으로 뚱하게 여명 마주 본다. 부채 탁 소리 나게 접더니만 그 끝을 여명 향해 겨눈다. 이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양 털을 곤두세우는 모 동물과 조금은 닮았을까.) 체통을 지키십시오 폐하. 대체 무슨 꿈을 꾸신 겁니까?
여명:(무뚝뚝한 얼굴에도 안심하지 못한 듯 당신의 볼을 잡는다. 조물조물. 말랑말랑한걸 보니 현실의 연화구나, 그제야 안심이 몰려온다.) 다행이다... 아니, 꿈? 자네는 혼인도 금지다! 은퇴도 금지!! 다 금지이니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거라!!
(아, 아니 이러면 나랑도 혼인을 못 하나...?)
연화:...늫으습스으. (놓으십시오. 필시 그리 말하고 싶었다만 붙잡힌 볼에 발음이 잇새로 솔솔 새어나갔다. 감히 황제의 손길을 쳐낼 수도 없는지라 한결 더 뚱해진 눈빛만이 그의 마음을 대변했다.) 한 번도 떨어진 적 없습니다만, 그게 무슨 억지입니까. 대낮부터 이런 말들만 늘어놓으시는 것을 보니 이제 악몽의 여파는 다 털어내신 모양입니다. (ㅍ.ㅍ)
여명:(새는 발음에 푸슬푸슬 웃는다. 뒤이어진 당신의 말에는 눈썹을 한껏 늘어뜨리며 퍽 곤란한 티를 냈다.) 어, 억지라니.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인데도. 그야 자네가 없다면 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고, 그 결과로 반란을 맞아 죽을 게 뻔하지 않으냐! (올망올망. 최대한 불쌍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악몽 때문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내 눈이 보이지 않느냐...?
연화:지나친 비약이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황위를 안겨드리던 순간부터 바로 그 위험을 쳐내기 위해 줄곧 제가 잠도 줄여가며 노력했던 것을 잊으신 겁니까. (불쌍한 척하는 게 뻔히 보이는 낯이었으나, 그 얼굴을 마주한 이상 네 요구에 따르는 것은 불가항력이었으므로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제 친우는 한없이 다정하나, 꼭 한 번씩 이리 약게 굴 때가 있었다. 제 얼굴을 무기로 쓰다니 괘씸하기도 하지. 차마 때릴 수 없는 동그란 이마를 가만 보다가 시선을 돌린다. 마음을 굳게 먹자 다짐하면서.) 이제 안 보입니다. 슬슬 일어나시지요. 벌써 진시가 거의 지나고 있는 참입니다. 보통은 묘시가 되기 직전쯤에 일어나지 않으셨습니까. 게으름은 이제 충분히 부리셨습니다.
여명:(그의 낯빛이 서서히 죽어갔다. 연화가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어리광만 잔뜩 부리다니... 이래서야 나잇값을 못 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겠나!) ...미안하다.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보구나. (곧장 자세를 바로 하고 짐짓 진지하게 바라본다. 분위기를 잡고는 낮게 헛기침을 내뱉는 꼴이 퍽 웃겼다.) 그래. 이제 일어나 업무를 처리할... ...아니, 무어라? 진시?! (퍼뜩 놀란 그가 빠른 걸음걸이로 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이미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새가 듣기 좋게 지저귀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진시가 맞았다. 여태까지 늦잠을 잔 적이 손에 꼽는데. 심지어 황제가 된 후에는 단 한 번도 없었데! 아니, 한 번 정도 있었나? 아무튼.) 왜, 왜 날 깨우지 않고... 악몽이 아니었다면 계속 내버려 둘 셈이었나...?
연화:(흠흠. 웃음을 참으려 짧게 헛기침을 흘렸다. 다시 뚱한 낯으로 돌아와선 태연하게 말 잇는다.) 그동안 폐하의 노력으로 업무들도 많이 비었습니다. 그 탓에 그동안 많이 피곤하셨을 테니 일부러 주무시게 두었습니다. 내일 사절단이 도착하니 피곤하다면 더 쉬셔도 되긴 합니다만. 생각해 보니 무리해서 일어나실 필요는 없으실 듯합니다.
아. 그래요. 시간은 흘러 흘러 야시장이 바로 내일입니다.
기분이 어떤가요? 오지 않기를 바랐나요. 아니면 오기를 바랐나요.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저이가 쓴 장부를 서랍 깊은 곳에 넣어두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여명:(기분이 어떠하냐니. 그걸 말이라고! 최악이다, 최악!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냔 말이냐! 왜! 왜애애애애!) (베개를 힘껏 팡팡 친다. 울분을 토해내듯...)
연화:(부드러이 베개 내리치는 손 위로 제 손 겹쳐올린다. 가볍게 두어 번 토닥이듯 손끝 손등 위로 스치더니 이내 손길 거둔다.) 먼지가 날립니다 폐하. 환기라도 한 번 하시는 게 좋겠군요. 궁녀에게 일러두겠습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다.) 푹 쉬실 수 있도록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오시가 지나기 전에는 부디 업무에 복귀해 주십시오.
여명:(당신의 손이 제 손 위에 올라오자 움찔,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부러 빼지 않고 버텼다. 거둬지는 손길에 아쉬운 듯 당신을 빤히 쳐다본다.) 어, 어어? 아. 환기... 으응, 고맙네. 연화도 푹 쉬어라... (어찌 사람이 저리 자상할 수 있는 건가? 이래서 반했지 내가! 이래서어! 한 번 더 연화에게 반한 순간이었다.)
이내 점점 멀어지는 그 발소리마저 멀리 사라지면 완벽한 고요입니다.
그림자처럼 숨어있는 호위무사들과 내관들은 기척을 숨기는데 도가 터 있어 이 넓은 궁에 당신 혼자 누워있는 듯한 감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꿈에서조차 다정한 시선 하나 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꿈에서조차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연화.
인간인지 알 수도 없던 정인에게 향하던 다디단 시선이 당신에게는 지나치게 담백합니다.
그에게 자신은 모셔야 할 주군이며 보필해야 할 존재.
하물며 곁에 있는 것조차 방해가 된다는 바보스러운 착각을 하며 기어이 연화는 당신을 떠나가려 합니다.
초롱 안에 매화 모양 초를 넣고 불을 피우자 꽤 그럴듯한 모양새가 나옵니다. 급하게 구한 것치고는 나름 훌륭하네요!
연화:(초롱 힐끔 보고는.) 폐하. 누구와 함께 초롱을 들고 걷고 싶으십니까?
여명:응? (초롱을 보며 감탄하던 그가 의아한 얼굴로 당신에게 시선을 옮긴다.) 그리 말하면 섭하네, 부인. 나는 부인을 두고 다른 여인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네!
연화:(이내 입술 잘근 씹는 낯이 짧게 달아올랐을까, 두 번은 안 통한다는 듯 눈 부릅뜬 채로 여명 마주한다.) 저와 함께 걷고 싶다니 제가 유능하다 인정해 주시는 거겠지요. 영광입니다 폐하.
여명:(붉어진 얼굴에 잠깐 기대했으나, 부릅뜬 눈 마주하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낯으로 변했다. 섭하구나...ㅜㅡㅜ) 에잉! (시무룩한 낯으로 고개를 돌린다. 연화 자네는 왜 이리 눈치가 없는 건지 모르겠구나. 아니, 일부러 눈치 없는 척 하는 건가...) 이제 슬슬 출발하도록 할까. (그리 말하며 초롱을 당신 손에 쥐여주었다.)
이후 매화 초롱 대신 손에 무언가를 살펴본다면 어라...? 이것은 언젠가 진상품으로 올려진 것 중에서 찾아낼 수 있던 물건입니다.
서양에서는 램프라고 불리는 물건이라 합니다.
금으로 만든 듯 표면은 반짝거리며 광택이 나고 표면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연화:(힐끔.) 폐하. 그나저나 손에 드신 그것은 무엇입니까?
여명:이것은... (멍하니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램프, 아닌가? 이게 왜 내 손에... (그럼 그 어르신은 헛것이 아니었다는 건가? 의문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유용한 물건은 이것을 지칭하는 것이었나?)
연화:(램프 빤히 바라보다가 여명 향해 두 손 내민다.) 폐하. 위험한 물건일지도 모르니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여명:아, 그럼... (아무 생각 없이 넘기려던 그가 퍼뜩 놀라더니 손을 거둔다.) 아, 아니! 위험할 수 있으니 넘기라는 게 무슨 망발이느냐! 연화 자네는 내가 부인에게 위험을 부담하게 하는 그런 인물로 보이느냐?
연화:(부인 소리에 슬슬 심통이 나는 듯 눈이 가늘어진다.) 폐하. 그 부인 소리는 언제쯤 거두실 겁니까. (재차 램프 힐끔대더만.) 살펴보고 싶으니 궁으로 가기 전 잠시만 맡고 싶다는 것으로 발언을 정정하겠습니다. (이제 됩니까? 라고 묻는 듯한 눈으로 여명 응망한다.)
여명:(자네는 정말... ...내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란 걸 모르는 건가? 부인이라는 호칭이 심통이 난다 하더라도, 더 이상 자네에게 위험한 일을 넘기는 건 하고 싶지 않은데. 그의 두 눈에 잠시 씁쓸한 빛이 어렸다.) ...그래, 그렇다면야. (힘없이 램프를 내밀었다. 당신의 시선은 고개를 내려 피했다.)
연화:감사합니다. (정작 그 당사자는 그런 네 속을 모르는 모양이다. 편안한 낯으로 랜턴 받아든 뒤에야 문득 떠올랐다는 양 물음 건넨다.) 폐하. 혹시... 그자는 어디로 갔습니까? ...아까 폐하와 같이 있었던... 여인 말입니다.
여명:아, 그 여인? 당과를 닦고서 쳐다보길래, 나를 유혹하려면... (연화를 데려오라고 소리치니 가버렸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뻔뻔스레 즐겨놓고, 왜 이제 와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어라 정의내릴 수 없는 감정에 한참 동안 침묵을 입에 올렸다.) 아니, 급한 일이 있다면서 혼자 뛰어가더군.
연화:그가... (그냥 갔단 말입니까? 짧게 침음을 흘리곤 이내 고개를 갸웃거린다. 금세 별일 아닌 양 털어내곤 여명 향해 작게 미소 지어 보이고.) 알겠습니다. 이제 어디를 가고 싶으십니까 폐하?
연화는 [장신구점]에서 장신구를 살 수도 있고, 오기 전에 보았던 [포장마차]들 중 하나에 들어가 이런 저런 음식을 즐기는 것도 괜찮다고 합니다.
말을 들어보니 [금붕어 잡기]도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여명:이왕 나왔으니 장신구 점부터 들리지. 사진 않더라도 무얼 파는지 보고 싶구나. (자네가 하나 사준다면 말이 다르겠네만. 농조로 덧붙인다.)
연화:제 모든 재산은 폐하께서 내려주신 것이지요. 폐하를 위해 쓰는 것이 당연합니다. 둘러보시다가 마음에 차는 것이 있다면 부디 저를 불러주십시오. 물론... 계속 폐하 곁을 지킬 예정이긴 합니다만. (퍽 진지한 어조로 답한다.)
여명:농이 통하지 않는 것은 변함없구나. 뭐, 농이 통하지 않아 자네답다고 할 수 있다만... (말끝을 흐리며 말갛게 웃었다.) 모든 재산을 자네를 위해 썼으면 좋겠네. 오랜 친우가 제 몸을 사리지 못하고 내 곁을 지키는 것에만 신경 쓰고 있으니 내 마음도 영 편하지만은 않아. 재상의 안위가 내 안위와 직결된다는 것도 알아줬으면 하네. (잔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제 진심인 것을.)
연화:재상은 대체될 수 있지만 황제는 대체될 수 없는 존재이지요. 제가 말씀드렸지요?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뒷말은 부러 삼켰다. 당신은 늘 내 말을 오래도록 기억했으니, 이 말도 필시 기억하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제 장신구점으로 가도록 하지요.
장신구점
예로부터 화려한 보석들을 탐내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는 지금 장신구 점이 때 아닌 성황을 누리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겠죠.
장신구들은 조금은 진부하게 매화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옥으로 깎아 석류석으로 매화를 표현한 비녀, 단백석에 모양을 새겨 엮은 갓끈, 남주석으로 장식한 진주 목걸이, 금강석이 크게 박힌 가락지 등등 남녀노소 불문하고 욕심낼 만큼 아름다운 것들이 잔뜩입니다.
혹은 은밀하게 홍월의 입에 뭐라도 넣어준다던가...! 가만 보면 홍월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고 있으니까요!
여명:(설득이라 하면, 어찌... ...일단 이자의 입부터 막아야겠군. 홍월의 입에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확인도 하지 않고 쑤셔 넣는다.) 이제야 말을 할 수 있겠구나! 내가 정인으로 삼고 싶은 여인은, 오늘 처음 만난 이 왈가닥한 사람이 아니라!! 완벽하고, 아름답고, 누구보다 빛나는 연화라는 사람이란 말일세!!! (냅다 이런 말을 한다면 연화 자네가 잔소리할 테지만 어쩌겠는가... 자네도 아까 날 방치했으면서! 흥.)
입에서 진주를... 하나씩 뱉어내는 홍월을 보느라 여념이 없던 연화는 당신의 말을 듣지 못한 듯싶습니다...
장신구점 주인:왐마야...
여명:(쒸익) 오해는 좀 풀렸는가, 주인장!!
장신구점 주인:어... 된 것 같구먼... 뜨거운 사랑을 하는 중이었군!! (여명 등 툭툭.)
에잇 기분이다. 원하는 장신구 한 개를 골라보게! 내 특별히 선물해주리다!
홍월:(진주 툭... 툭 뱉으면서 여명 봄.)
여명:아니 이제 와서 되었다고 하면... (화색) 아주 좋네!! 그렇다면 가락지가 좋을 것 같은데. (장신구를 찬찬히 훑던 그가 시선이 느껴져 홍월을 바라본다. 뭘 보나?! 흥일세!)
홍월:(진주 툭... 툭...)
장신구점 주인:흠흠. 여기 이 옥가락지는 어떠한가? (어여쁜 한 쌍의 옥가락지를 가리킨다.)
여명:(눈 반짝) 오오,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자네, 는... (평소처럼 연화를 부르려다 눈치를 살핀다. 아까는 아무 생각 없이 질렀는데, 갑자기 후환이 두렵구나...)
연화:(그 눈빛 받고는 짤막하게 숨을 내쉰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느리게 여명의 어깨에 손 얹으며 말 건넨다. 손끝으로 어깨 가벼이 치며 친구처럼 대하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흘린다.) ...명아. 마음에 드는 장신구를 찾은 거니? 눈치 보지 말고 불러도 된대도. (이내 지갑을 찾는 듯 제 허리께를 더듬는다.)
장신구점 주인:호오. 이제 보니 친구끼리 나들이를 나왔었나 보구먼? 이 장신구는 내 선물이니 돈은 내지 않아도 괜찮네!
연화:(감사하다는 듯 눈인사 흘리곤 가락지 한 쌍이 담긴 케이스 챙겨 여명 손에 꾹 쥐여준다.) 마음에 들어?
여명:어, 어? (판단이 느려졌다. 갑작스레 발생한 사건을 바로 인식할 수 없었다. 당신의 목소리를 살펴 기분을 파악하는 것조차 불가했다. 그의 반응은 지금 유별날 정도로 느렸다. ...아마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닌 것 같아서겠지.) 아. 마음에, 들어... (뒤늦게 반응했다. 당신이 내뱉은 말과 똑같은 말이었지만 뚝뚝 끊기는 어조 때문인지 아예 다른 말처럼 느껴졌다. 옅은 웃음. 그것은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한 시도였을까, 아니면 찰나라도 당신과 연인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기쁨이었을까.)
연화:(묘하게 뚝딱이는 듯한 말에 느리게 웃음 흘렸다. 어릴 땐 말을 놓고 잘만 대화했었는데 다 커서 이리 말하려니 새삼 어색하기라도 한 걸까... 상념 이어가다 이내 손으로 제 입가 찬찬히 쓸었다. 그러고 보니 널 이리 편히 대하는 것은 거진 몇 년 만의 일이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어쩐지 누군가가 제 심장께를 살살 간질이는 듯했다. 이건 무어라 정의되는 감정이더라. 분명, 어느사랑 소설에서...) ...다행이야. (그리 느리게 기억을 더듬어가다 보면 옅은 환희가 네 얼굴 가득 차오른 뒤다. 그리고 그 반짝이는 낯과 마주하고 나서야 확신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너는 지금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밤하늘을 꼭 닮은 그 검은 눈동자가 내게 알려준 사실이야. 세차게 뛰는 심장이 지긋이 제 두 귀를 막았다. 순간이 영원 같던 수 초가 지나고 나서야 겨우 여상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찬찬스레 고개 숙여 네 귓가에 속삭인다. 이 묘한 긴장감을 끊어내기 위함이다.) ...이제 슬슬 다음 장소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아직 즐길 거리는 많이 남았습니다.
여명:(당신의 느릿한 웃음이, 가느다란 손가락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 어느 하나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잔잔하게 고동쳤다. 분명 지금 나는 황제이고 당신은 나의 재상이었다. 그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당신을 향한 이 감정이 무엇인줄도 모르고 그저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지냈던 그날처럼. 다행이야. 그 말이 제 심장께를 툭툭 간질였다. 아아, 그래 이건...) 당신에게 한 가지 질문해도 될까요. (그 언젠가 응달에서 들었던 사랑 이야기와 똑같은 맛이었다. 이것은 애정이고, 흔적이고, 화인이구나. 내 심장에, 지울 수 없는 감정을 남겼구나. 간질거리는 감정이 등허리를 타고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더는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울렁거리는 감정이 말이다. 감히 이 순간을, 햇빛으로 박제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연화는... ...사랑이 무어라 생각하십니까. (그래, 아직 즐길 거리는 많다. 그러니 내 마음은 그 모든 게 끝낸 후에 고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눈을 감고 옅은 웃음을 허공에 풀었다. 그 속에는 행복이 넘실거렸다.)
연화:(네 존댓말에 일순 몸이 굳었을까, 이리 얼빠진 낯으로 대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능숙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예, 하문하십시오. 예와 같이 감정 빠진 얼굴로 가만 네 질문을 기다리자면 네가 입을 열기까지 그 찰나의 공기 흐름까지 모두 느껴지는지라. 새삼스럽게도 아, 내가 지금 긴장을 하고 있구나... 하고 자각하게 된다. 왜 긴장을 했을까. 너하고 봐온 세월이 몇 년인데. 그간 수도 없이 많은 명령을 받았고, 또 그만큼의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만 기대 버텨온 세월 또한 적지 않을 텐데. 대체 무어가 지금의 시간을 이리도 특별히 느껴지게끔 만드는가? 아무도 답해주지 않으니 이러한 의문들은 그저 쌓여만 갔다.) 사랑이 무어냐 물으셨습니까. (새삼스럽게 그 정의를 물어보는 것은 아닐 터였다. 질문의 저의를 파악하려는 듯 가만 네 눈을 들여다보았으나 그 속에는 넘실거리는 행복만이 잡힐 듯 선명히 그려질 뿐이었다. 아프지 않게 제 입술을 짓씹었다가 느리게 답을 뱉었다. 어찌 되었건, 주군이 물은 질문에 어떠한 대답이든 내놓는 것이 충신의 의무이니.) 남녀가 서로 정이 통했을 때 그를 사랑이라 칭하는 경우가 가장 많겠지요. 또, 신하가 주군을 섬기는 것 또한 넓은 시각으로 보면 사랑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일순 머뭇거린다. 이것이 과연 맞는 답일까? 의문이 치밀었으매 답을 이어간다. 드물게도 자신 없음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뚝뚝 끊겼다.) 진정한 사랑이란 그 사람을, 또 그 사람을 이루는 주변 것들까지 모두 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 곁을 스쳐가는 한겨울의 찬바람에서도 포근한 꽃향기가 느껴진다면 그것이 사랑일 겁니다. (고개 들어 여명 응시한다.)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사랑과 제가 생각하는 사랑은, 많이 다릅니까?
여명:(찰나 굳은 당신의 몸이 보였다. 거의 처음 보는 반응에 아이처럼 흥미가 돋다가도, 당신이 내뱉을 대답이 궁금해 다시 입을 닫았다. 자신감 없는 목소리에 그가 살풋 웃었다.) 충분한 대답이 되었으니 그리 풀 죽어 있지 마시지요. (저를 응시하는 당신에 따라서 빤히 눈을 맞춘다. 이어지는 질문에는 무언가 생각하기라도 하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운을 뗐다.) 아름다움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어렵다. 아름다움은 고결하다. (질문과는 무관해 보이는 단어를 나열한다. 참으로 모호한 대답이었다.) 과거 타국에서 한 문장을 이 세 가지로 해석했다고 합니다. 각기 다른 단어로 뻗어나갔지만, 나는 그들의 본질은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고결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들을 완벽히 갖기에는 어렵겠지요... (모호한 말들을 던져놓는다. 얼핏 보기에는 붕 뜬 말이었지만, 그는 그 의미를 음미했다.) 고귀하므로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 (그대는 고귀하고, 아름답다는 의미입니다. 그 문장은 구태여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똑똑한 당신이라면 알아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떠한가. 나에게 있어 사랑이란, 당신 하나로 응축되었다. 감히 탐내서는 안 되는 이. 감히 탐내서는 안 되는 감정. 그러므로 곁에 있는 것에 만족해야겠지. 이따금씩 발칙한 욕심이 고개를 디밀었지만, 그것은 오로지 내가 감내해야 할 몫이다. 아니, 어쩌면 벌이겠지. 주제도 모르고 사랑에 빠진 이에게 내릴 수 있는 벌은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어쩐지 씁쓸한 기분에 조금은 슬피 웃었을지도 모르겠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시선 끝에 당신을 담았다. 그 슬픔은 곧바로 지웠지만.) 아까 이동하자고 하지 않았느냐. 아직 시간은 많으니 슬슬 이동하는 것은 어떤가, 재상.
연화:(그 말의 의미를 헤아리려 머리를 굴리다 보면 이상하게도 그것이 누구를 향하는 말인가?라는 질문에 거듭 부딪혔다. 당신은 대체 누굴 위해 그 말을 꺼내는 것일까. 스스로를 위한 말이라기엔 당신답지 않고, 그렇다고 나를 향하는 말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달아서.) ...아. (자신도 모르게 불경한 추측을 이어간 것을 깨닫자마자 세차게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과한 추측은 삼가야 한다. 그의 신하답지 못한 짓을 했어. 그리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다.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 모든 말을 그대로 외워버리면 그만이다. 후에 이 말을 곱씹고 또 곱씹다 보면 언젠간 그 모든 의미를 깨닫는 날이 오기 마련이니. 수신인 없는 낱말들을 고스란히 뇌리에 박아 넣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따르겠습니다. (이내 주위를 둘러보는 듯하다 나지막이 읊는다.) 지나가면서 봐온포장마차에 들리시겠습니까? 서민들의 음식을 맛보는 재미가 있을 겁니다. 혹은 인기가 많다는금붕어 잡기를 체험하러 가보시는 것도 좋을 듯하군요. 이렇게 큰 야시장이 들어서는 일은 드무니, 기회가 될 때 즐겨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명:(그는 말없이 웃고 있었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더라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제 뜻이 당신에게 닿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뭐, 어느 쪽이더라도 제 입으로 다시 사랑을 속삭인다면 그만이니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흑색의 깊은 눈동자가 당신을 응망했다. 그것은 은하수가 낀 밤하늘과 닮아있었다.) 슬슬 시장해지니 포장마차에 가보는 것은 어떤가? 다니면서 자네 입맛에 맞는 음식도 알려주면 좋을 것 같네만. (평소처럼 눈을 곱게 반달 모양으로 접어 웃어 보였다. 눈동자가 속눈썹에 의해 자취를 감췄다.)
연화:(그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말 올린다.) 조금 더 이기적으로 굴어주시옵소서. (허나 당신이 그럴 리 없으니까... 뒷말은 부러 생략하곤 제 말 이어갔다.) 폐하께서 마음에 드시는 음식이 있다면 그걸 함께 들고 싶습니다. 소신의 단 하나의 바람이오니 부디 들어주시옵소서. (그에 답하듯 옅은 미소 지어 보인다.)
여명:(고민하는 당신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당신의 말에 그가 웃음이 어린 목소리를 허공 속으로 흘려보냈다.) 알겠네, 재상.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내가 그 부탁을 들어 보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 (말을 마치고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간단하게 먹을 만한 건 없으려나.)
포장마차
야시장답게 이런저런 길거리 음식들이 다양하지만, 사람이 전부 많습니다.
꼬치라던가, 손에 들고 먹을 수 있는 것들 위주지만 몇몇 포장마차들은 본격적으로 식사를 하는 것처럼 술과 함께 먹는 사람들도 눈에 띕니다.
연화:폐하. 무얼 드시고 싶으십니까? 감히 황제를 줄 세우게 할 수는 없으니 제가 사 오겠습니다. (힐끗 널 바라보며 옅은 장난기가 묻어나는 어조로 말 뱉는다.)
여명:이왕이면 다양한 요깃거리를 먹어보고 싶은데... (당신의 질문에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흘리듯 대답하던 그가 뒤이어진 말에 당신에게 시선을 옮긴다.) 아, 아니. 오늘 나는 황제로 나온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할 필요가 어디 있다고 그러나. 그냥 자네와 같이 줄 서서 기다리는 것도 좋은 경험이지 않겠나? (올망올망 쳐다본다. 당신과 한시라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연화:(그 시선에도 무뚝뚝한 낯 유지하다 돌연 고민된다는 듯 침음 흘린다. 이내 고개 주억이곤 네 손목 슬쩍 붙잡는다.) 함께 가지요. 멀지 않은 곳에 제가 아는 가게가 있으니 우선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연화는 당신을 데리고 어딘가로 가더니, 이내 어떤 가게 앞에 서서 무언가를 주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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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제 손목을 잡은 당신의 손을 느릿하게 떼내어 맞잡았다. 퍽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이왕이면... 손잡고 가는 것이 어떤가? (딱히 뒷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손잡는 것까지 여러 핑계를 대가면서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리라. 조금은 욕심내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연화:...사람이 많아도 폐하를 놓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괜스레 맞잡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 이었다.) ...모시겠습니다.
연화는 당신을 데리고 어딘가로 가더니, 이내 어떤 가게 앞에 서서 무언가를 주문합니다.
빈 다른쪽 손에 무언가를 받아든 연화가 당신을 돌아봅니다.
연화:폐하.
여명:오, 벌써 나온 것인가? (눈 반짝이며 당신의 손에 들린 무언가를 바라본다.)
연화:(네 시선이 향함에 옅게 웃음 짓고선 단호한 어조로 말 잇는다.) 아 하십시오.
여명:...내가? (당황스러운 낯으로 쳐다본다. 일단 아 하라고 하니까...) 아아.
입을 벌리면, 달콤하고 물컹한 과일 향이 아는 무언가가 입안에 들어옵니다.
조금 전 홍월이라는 사람이 들고 있던 간식입니다.조금 전 홍월이라는 사람이 들고 있던 간식입니다.
여명:잠시만! (급히 당신의 손을 붙잡았다. 조금은 불안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르는데... ...그, 조금만 기다리다가 가면 안 되느냐...?
연화:(여명을 돌아본다. 이내 단호한 어조로 말 잇는다.) 이리 큰 야시장에서 소란이라도 났다간 자칫 큰일로 번질지 모르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싸움이 났다면 말리는 것이 뒤탈도 없고 처리도 쉽겠지요. 제가 다녀올 테니 부디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이내 손을 부드러이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간다.)
소리가 난 곳은 한 포장마차의 앞입니다.
불구경 다음으로 재미있는 건 싸움 구경이라던가요. 몰려있는 사람들 사이를 연화가 비집고 들어갑니다.
여명:이, 익. (연화가 간다면 나도 같이 간다! 사람들 틈새로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장정들에게 끌려나가는 사람은 공포에 질려있습니다. 무언가에게서 도망치려는 듯 계속해서 붙잡힌 몸을 빼내려 몸을 비틉니다.
하는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누군가가 자신을 끌고 가려 한다는 것 같아요.
?:어휴.. 잘 먹더니 왜 저런담...
잔뜩 흥분한 그 사람이 곧이어 사라지고, 인파가 흩어지면 가게 주인이 혀를 차며 다시금 음식을 준비합니다.
곧이어 도와줘서 고맙다며 갓 나온 음식을 연화에게 건넵니다.
연화:...고맙습니다. (음식 받아들곤 그제서야 주위 돌아본다. 여명과 눈 마주치곤 느리게 눈 두어 번 깜빡인다.) 폐하.
여명:연화, 연화. 괜찮나? 응? (서둘러 당신에게 다가가 얼굴을 살핀다. 저가 맞은 것도 아니면서, 아픈 듯 얼굴을 찡그렸다.)
연화:괜찮습니다. (되려 자신보다 더 놀란 듯한 널 달래려는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음. 드시겠습니까? 아까 이것저것 맛보고 싶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말하며 테이블 위에 음식을 내려놓는다.)
여명:(당신의 말에도 얼굴이 펴질 줄 모른다. 대답 없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내가 먼저 달려갈걸, 싶다가도... 좋은 마음으로 달려간 당신의 앞에서 계속 이러고 있는 것도 좋을 건 없겠다 싶어 애써 표정을 풀었다.) 그래... 고맙네. 이건 무슨 음식인가?
연화:듣자 하니 설매화꽃으로 만든 양갱이라 하더군요. (이내 한참 머뭇거리다 양갱을 여명의 입 근처에 가져다 댄다.) 한입 하시지요.
여명:(빤히 양갱을 살피던 그가 조용히 받아먹는다. 음, 당과랑 비슷하게 생기긴 했지만 맛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우물우물.) 으음, 그래.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인가?
달콤한 맛이 강하게 도는 양갱을 가만히 씹다 보면 매화향이 입안 가득 피어오릅니다.
이내 연화는 고민하는 듯하다 손끝으로 금붕어 잡기가 한창인 곳을 가리킨다.
가리킵니다. 유교 체크.
연화:저기에 가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여명:금붕어 잡기? 아직 연화는 그리 많은 음식을 먹지 못하지 않았나.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당신을 살폈다. 자네의 제안이니 거절할 일은 없긴 하다만...)
연화:(고개 작게 젓는다.) 배가 그리 고프지 않습니다. 이만 가도록 하지요.
금붕어 잡기
커다란 수조 속을 금붕어들이 느긋하게 헤엄치고 있습니다.
바로 옆에 다방이 있는 걸 보면 고된 육아로 지친 부모가 아이들이 금붕어에 정신이 팔린 사이 조금이라도 숨을 돌릴 수 있게 하기 위한 공간으로 보입니다.
당신이 볼을 밝히든 밝히지 않든, 금붕어들은 평화롭습니다. 물결을 타고 흔들리는 비늘들이 차분하네요.
그 순간, 옆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납니다.
어린아이가 먹고 있던 음식 하나가 금붕어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빠집니다.
다른 금붕어들은 갑작스럽게 빠진 물체에 겁을 먹어 도망가고. 연화를 연상하게 하는 금붕어가 그 물체를 덥석 삼킵니다.
그런데 떨어진 음식이 정상적인 건 아닌가 봅니다. 음식물을 삼킨 금붕어가 잠시 몸을 뒤틀더니 지느러미를 움직이지 못하고 축 늘어집니다.
뒤집혀서 떠오르지는 않는 걸 보아 아직은 살아있지만 저대로 둔다면 먹이를 먹지 못해 언젠가는 죽어가기 마련입니다.
여명:으, 응? (토해내게 해야 하나? 근데 금붕어도 토를 할 수 있나...?)
그때, 연화를 연상케 하는 금붕어의 아래로 뜰채가 들이밀어집니다.
홍월:엉? 아, 나으리 아니십니까. (헤.)
홍월의 등장입니다.
여명:(...얼빠진 얼굴로 바라본다. 자네가! 왜! 여기서 나오는데!) 크흠. 자네... ...혹시 나를 몰래 따라온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의심스러운 눈초리.)
홍월:에이~ 전혀 아니옵니다. 아, 혹시 그랬길 바라셨사옵니까? (찡긋~ 눈웃음 날리며 홍월이 한 발짝 여명의 곁으로 더 바싹 다가가 앉는다. 이내 정중하게 말을 잇는다.) 혹시 이 금붕어를 사실 겁니까, 폐하?
여명:(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로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두 발짝 멀어진다.) 으음, 사려고 한다만... ...혹시 자네가 여기 주인장인가?
홍월: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놀러 왔을 뿐이옵니다. (남은 한손 펼여보이며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한다.)
그 순간 연화를 연상시키는 금붕어가 있는 뜰채 안으로 또 다른 금붕어 하나가 들어옵니다.
당신을 연상케 하는 금붕어네요.
그 금붕어는 뜰채 바닥에 계속해서 가라앉는 금붕어를 자신의 몸으로 끌어올립니다. 아마도 구해주려고 하는 거 같아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주인으로 보이는 이가 당신을 연상케 하는 금붕어를 피해 연화를 연상케 하는 금붕어를 건져 올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립니다.
주인:아이고... ... 두 번은 못 구해 이것아.
여명:(금붕어를 건져 올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의아한 듯 운을 뗀다.) ...두 번이라니?
주인:(힐끔 보더니.) 아아. 이놈들 어릴 때 똑같은 일이 일어났었거든. 요놈이 요놈을 말이여, 또 요로코롬 구해줬었단 말이지. (당신과 연화를 연상케 하는 금붕어를 차례로 가리킨다.)
(쯧쯧.) 에잉. 아깝구먼. (이내 물 밖으로 나와 숨을 쉬지 못하고 파닥거리는 금붕어를 데려간다.) 잘 놀다 가시게~. (손 휘휘.)
여명:......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낯으로 주변 둘러본다. 연화를 찾는 듯.)
연화:혹시 절 찾으십니까? (여명의 바로 뒤에서 나지막이 속삭인다.)
여명:아, 연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돌아본다. 잠시 제 입에 침묵을 올리며 당신을 빤히 쳐다본다.) 두 번은 구할 수 없는 걸까? (대뜸 질문한다. 약간은, 굳은 표정이었다.)
연화:(?) (느리게 고개 기울인다. 요새 자신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곧잘 던지곤 하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진지하게 답한다.) 몇 번이고 지켜드리겠습니다. (이게 아닙니까? ㅍ.ㅍ)
여명:(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린다. 분명 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았음에도, 어쩐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자네가 지켜주겠다고 하니 안심이라네. (눈을 접으며 웃은 그가 검은 금붕어를 바라본다. 이대로 두기에는 마음에 걸리는데...) 여기 이 금붕어 한 마리를 데려가고 싶은데. 들어줄 수 있겠나?
연화:물론입니다. 시종에게 챙겨두라 이르겠습니다. (제 두 손은 당신을 지켜야 하기에 늘 자유로워야 하니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뒤에 잠복해있을 신하에게 손짓한다.) 그리고 폐하. 여쭤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혹 인형극에 관심 있으십니까?
여명:으응, 그래. 같이 살아보자꾸나. (금붕어에게 말을 걸듯 어항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던 그가 뒤이어진 당신의 말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아니, 언제부터? 뒤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신하에 조금은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어, 인형극? 흥미가 없진 않지... 한데 그것은 왜?
연화:(저번에 일러드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눈 가늘게 뜨며 여명 본다. 이내 짧게 한숨 내쉬곤.) 다름이 아니라 이 주변에서 인형극을 한다고 하더이다. 폐하를 위해 소신이 입장권을 얻어왔으니 다음으로는 이것을 즐기러 가시면 될듯합니다. (그 말을 하며 네 팔목에 팔찌 하나를 채워준다.) 이것이 있어야 인형극을 볼 수 있으니, 절대 끊거나 하셔서는 안 됩니다. 아셨지요?
그나저나 연화... 생각보다 이 야시장을 정말 진심으로 즐기고 있네요.
여명:(...억울하다! 사람이 좀 잊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애초에 자네랑 야시장을 즐길 것에만 정신이 팔려서 제대로 안 들은 건데!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잘못했네... 응... 꿍얼꿍얼 거리던 그가 당신의 말에 갑자기 두 눈을 빛냈다. 아니, 이건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알겠네! 내 목숨보다 더 소중히 대하도록 하지! (그리 말하며 두 눈을 접어 웃었다. 자네도 생각보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구나, 그리 생각하며.)
연화:(그 말에 무어라 잔소리하려다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내 옅은 미소 지으며 앞장서 나아간다.)
인형극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있습니다. 시작하려면 조금의 시간이 남은 듯 합니다. 자리를 잡아볼까요?
연화는 눈 그늘을 가리기 위해 분을 가득 칠했으며, 어딘가 파리한 안색이 꼭 지독한 병에 걸린 병자 같습니다.
연화:(그 말을 듣곤 조금 피곤한 안색으로 웃어 보인다.) 몸은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는 늘 이래오지 않았습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은 몸이 좀 더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거듭 강조한다.)
여명:(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음에도, 당신의 말에 반박할 방도가 없었다. 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연화. 그렇다면 잠깐 나와 산책이라도 하면 어떤가? 자네의 말처럼 늘 이래왔으니, 하루쯤은 환기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연화:(네 말을 듣고는 가만히 널 바라보았다. 네 제안이 달가웠으나, 쉬이 그를 수락해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늘 최선의 선택만을 거듭해야 하는 위치에 앉았으므로 허락되지 않던 자유다. 머뭇거리다 느리게 말을 꺼낸다.) ...야시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호숫가에, 매화꽃이 정말 예쁘게 피습니다. 그리고 그 호숫가에서는 뱃놀이를 운행하고 있습니다. ...같이 그 뱃놀이를 즐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명:(혹시라도 제 제안을 거절할까 조마조마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던 그가 당신의 대답에 말갛게 웃었다. 이렇게라도 하루를 보내는 게 어디인가.) 여부가 있겠는가? 나는 전부 괜찮으니 연화의 말대로 따르겠네. 혹시나 더 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내게 알려주게나. 나도 나랏일이 슬슬 지루해지던 참이니. (부러 가볍게 굴었다. 이렇게 한다면 당신의 마음 또한 가벼워질까 싶어서.)
연화는 당신을 이끌고 호숫가로 향합니다.
[뱃놀이]
臨斷岸、新綠生時,是落紅、帶愁流處
記當日、門掩梨花,翦燈深夜語
절벽에서 굽어보니 신록이 생기는데
떨어진 붉은 꽃이 근심 안고 흘러서
옛날에 대문 닫아 배꽃을 가둬 놓고
심지 자르며 밤 깊도록 얘기한 일 기억난다
*
겨울임에도 온 나무에 붉은 꽃이 알알이 만연하니. 봄과 겨울 그 사이에서 호흡하는 것이 새삼 신비롭게 다가옵니다.
이 호숫가는 수심도 깊고 그 면적도 넓어 어린아이들이 바다라 오해한다고 합니다.
새벽에 보면 안개처럼 뽀얀 기운이 올라와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는데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곳을 연애천이라 합니다.
야시장 기간에는 그 푸른 기운 사이로 보이는 불빛들이 그 자체만으로도 절경이라 불립니다.
한쪽에 나룻배들이 비스듬히 기대어있습니다. 벌써 몇몇 사람들이 배를 타고 호수를 노닐고 있네요.
호수 위에는 설매화 나무에서 떨어진 매화 꽃잎들이 조금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연화가 가져갔던 램프는 어디 있나요?
여명:(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무언가 생각난 듯 당신을 쳐다본다.) 아, 연화! 그러고 보니 어제의 그 램프는 어찌했나?
연화:(그 말에 가만 눈을 피한다.) 소신이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뱃놀이가 끝난 이후에 돌려드리겠습니다. 나무로 만든 나룻배 위에 불을 붙일 수 있는 물건을 들고 올라타면 위험합니다.
분명 아직 불을 피우지 않았던 거 같은데 말입니다.
그 사실에 대해 말을 올리려고 하면 당신과 연화의 차례가 됩니다.
뱃사공:두 명이야?
뱃사공이 친근하게 물어옵니다.
그와 동시에 연화가 슬쩍 발을 뒤로 뺍니다. 아마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와 함께 당신을 띄워 보내려는 모양입니다.
적의 마음은 그렇게 잘 알더니 주군 마음은 모르는 이 재상을 어떻게 하면 할까요?
여명:(뒤로 물러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흔들어 보였다.) 음! 이렇게 둘일세! 안 그렇소, 부인? (이렇게까지 했는데 같이 타 주게나! 울상 짓고는 작게 속삭인다.)
연화:... (부인 소리에 가만 여명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롭다. 또 그 호칭입니까? 라고 꾸짖는 듯한 낯.) ... ...물론입니다, 낭군. (말하곤 자연스럽게 손끝이 여명의 팔을 훑고 그 끝의 손으로 향한다. 네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 밀어 넣곤 깍지 낀다.) 이만 배에 오르실까요.
여명:(제 손에 얽히는 당신의 손가락에 몸이 굳는다. 아, 이러면 또 두근거리는데. 금세 붉어진 낯을 가리려는 듯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괜히 먼발치로 시선을 던졌다. 한참 동안 말없이 굳어있던 그가 얽힌 손가락을 풀고는 배에 올라탄다.) ...발, 조심하게나. (작게 웃은 그가 당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화:(스르륵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눈을 느리게 깜빡인다. 어색하게 굳은 채 펼쳐진 제 다섯 손가락 내려다보다가 온기가 옅어진 그 틈을 느리게 좁혔다. 상실감이란 것이 이런 것일까, 뜬금없는 감상을 떠올리면서.) 네. (이내 두 손이 다시 겹쳐지자 기이한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옅은 의문에 느리게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나룻배로 발돋움한다. 안정적으로 발 딛고 서선 널 똑바로 마주한다.)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는 제가 해드렸어야 하는 일입니다만... (멋쩍은 얼굴 한 채로 느리게 자리에 앉는다. 여전히 손은 맞잡은 채다.) 앉으십시오, 낭군. 이만 배를 띄우지요.
여명:(당신이 자리에 앉고 나서도 그는 제 손을 놓지 않았다. 분명 아까는 스스럼없이 붙잡았는데, 왜 이제 와서 이리도 조심스러워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아무런 대꾸 없이 당신의 옆에 앉았다. 아까 당신이 한 것처럼, 제 손가락이 당신의 손에 얽혀들어 깍지를 끼우자 어쩐지 부끄러워지는 기분에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요동치는 마음이 드러나듯 눈동자가 주체 없이 흔들린다.) 연화. ...입을 맞추어도 될까? (붉어진 낯으로 당신을 보는 그의 뺨은 마치... 붉은 매화 한 송이나 피어난 것 같았다. 물에 젖은 눈동자는 마치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연화:(한 번 본래의 온도를 잃은 것은 다시 이전의 온기를 되찾을 수 없다. 그것의 지구가 생긴 이래로 지켜져온 불변의 법칙이자 자연의 섭리이다. 그렇다면 네가 제 손을 잡음으로 인해 다시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어느 책의 어느 문구가, 어느 활자가 제 이 마음을 온전히 설명해낼 수 있지? 혼란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느리게 물었다.) 왜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 (문득 의문이 일었다. 혹시 네가 자신을 친우가 아닌 여인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 곧 그 끝에 붙은 물음표를 느리게 지워냈다. 그럴 리가 없으니까. 우리는 아주 깊은 친구 사이일 뿐이고, 그렇기에 이건...우리 우정의 마지노선이 될 터였다.자리에서 느릿이 일어났다. 맞잡은 한쪽 손은 여전히 네 손과 포갠 채로, 다른 손을 들어 흘러내린 네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순으로서 네 이마에 경애를 가장한 우정의 낙인을 찍었다. 찬찬히 고운 살결에서 입술을 떼며 멀리로 시선을 옮긴다.) 미색이 짙은 꽃은 늘 사람을 꾀어내지요. 설화국을 대표하는 매화꽃이 꼭 그러합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지금 꼭, 저기에 핀 꽃무리를 닮으셨습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면 그 끝에는 가지 끝에 아롱다롱 맺힌 꽃방울들이 위치했다. 그러니 이건 네가 나를 홀린 것이다, 명백한 네 탓이야. 그리 책임의 화살을 돌렸다. 찬찬히 자리에 앉으며 얽은 손을 빼곤 올곧은 시선을 보내왔다.) 마음에 차십니까.
여명:(한껏 쏟아내면 후련하기라도 할 텐데, 당신에게서 무슨 답이 나올지 몰라 지레 겁을 먹고 속으로 삼키기만 했다. 거절 받았을 때 돌아올 상처가 너무나 아릴 걸 알았다. 때문에 울렁거리는 마음을 속여서라도 감출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게 무슨 소용인가. 익숙하지만 낯선 손길이 제 머리칼에 닿았다. 또다시 한결같은 반응에 실망할까. 어쩌면 이것이... 영영 마지막이 될 것 같았다. 다시금 우정으로 마침표를 찍힐 수는 없었다.) 자네에게 내가 꽃을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오히려... ...나보다는 자네가 매화에 부합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네만. (지나간 시간이 고까웠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반복하지 않기로 굳어졌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욕심이 났다. 물기 어린 목소리가 허공에 부유한다. 웃지 않았으나, 그는 분명 웃고 있었다. 손이 빠져나간 자리에 당신의 뺨이 닿았다. 욕심 그득한 내 마음에 찰 것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연화,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이미 잔뜩 젖어버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은 줄기라는 개념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눈물 자욱으로 흐트러진 낯으로 당신에게 다가갔다. 숨결이 뒤엉킬 자리까지 다다르면, 기어고 눈을 감고 당신의 입술 위로 제 입을 맞추었다. 메마르기만 한, 접문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행위였으나 그는 분명, ...이 순간 그대로 모든 것이 멈춰버려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순간이 멈춘 것만 같던 그때, 배는 미끄러지듯이 육지에 도착합니다.
연화는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낯으로 먼저 일어나 나갑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배 위에 있던 건 아닌 거 같은데, 발 아래 닿는 지면이 꽤나 낯섭니다.
그 순간 여명은 이상한 감각을 느낍니다.
살면서 사람이 키우면 안되는 감각들 중 하나이지만 이 감각이 없었다면 당신은 이 자리에 없었겠죠.
돌아봐야해요. 하지만 돌아볼 수 없습니다. 등 뒤에서 쓰러진 누군가를 바라볼 자신이 없어요,
"재상!"
곧이어 어디선가 무화가 나타납니다. 그와 함께 이곳저곳에서 호위무사들이 나타납니다.
몇 명의 호위무사들이 당신을 호위하고, 나머지 무사들은 방금 화살을 쏜 이를 추격합니다.
연화가 말한 호위들의 동행은 이런 뜻일까요...
여명:(심장이 가슴을 뚫을 것처럼 뛰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고동 소리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다.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그가 삽시간에 얼굴이 질려 뒤를 돌아본다.)
어깨에 맞은 화살을 채 뽑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연화가 있습니다.
어깨를 붙잡은 그의 손에는 피가 흥건합니다.
그런데 피의 색이 이상해요.
분명 몸 안에서 박동하던 피일 텐데, 색이 거뭇합니다.
그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여명의 곁에 있던 무화의 표정이 파랗게 질려버립니다.
연화:무화. 폐하부터 먼저 지키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연화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합니다.
이 이유 모를 충성심을 당신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홀연히 다가와 감당하지 못할 것을 쥐여주고는 사라지는 이 천재를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요.
무화는 당신과 연화를 돌아보며 안절부절못합니다.
여명:무, 무화야... 왜 연화의 피가, 왜...; (공황에 빠진 듯 어찌할 줄 모르고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당신의 말에 순간적으로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 그 입 다물...! 아, 아니. 소리쳐서 미안하다.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다. 빨리 의원을 불러야... (중요한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에게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고개를 수그린 그가 마음을 다잡은 듯 당신을 바라본다.) 움직일 수는 있겠나?
연화:(힘겹게 고개 들어 널 올려다보았다. 그마저도 네 허리 부근에서 엎어져 또다시 땅바닥만을 눈에 담고 만다. 환부 짓누른 채 느리게 고개를 젓는다.) ...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 부축을, 받는다면 가능합니다. (말하며 무화를 바라본다.)
무화:(다급한 목소리로.) 폐하, 제가 재상을 모셔도 괜찮겠습니까? 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최대한 빨리 어의께 보여야 할 것 같습니다.
여명:(무화의 말에도 대꾸 없이 연화를 바라보던 그가 직접 연화를 들었다.) ...이대로 간다. 바로 궁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 맞나?
그것은 붉은 핏방울입니다. 아직 검붉게 변색을 하지 않은,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피입니다.
독의 효과일까요? 아니면 그 전부터 몸에 내상이 쌓여있던 걸까요.
당신은 연화가 도망친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명:(입술을 짓씹는다. 대체 왜, 어디로 도망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연화의 행동에 다시금 한숨을 쏟아냈다. 이제 남은 건 장롱인가. 조금은 느릿한 발걸음으로 장롱 앞으로 다가갔다.)
검은색의 조금 커다란 장롱입니다.
열어보면 이불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불만 들어가 있나요?
뒤져보면 뭔가가 더 나올지도 모릅니다.
여명:(이불을 뒤져본다. 무언가 없으려나...)
뒤져본다면 궤짝 하나가 장롱 구석에 박혀있습니다.
자물쇠로 잠겨있는 걸 보아 무언가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명:(궤짝...? 어딘가에 열쇠가 없으려나. 방을 한번 둘러본다.)
슬쩍 방을 둘러보아도 열쇠의 흔적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때, 밖에서 소란이라도 일어난 건지 분주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곧이어 무화가 당신에게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합니다.
연회 시간이 거의 다 됐다는 소식과 함께요.
여명:...연화는, 찾았느냐.
무화:송구하오나... 아직이옵니다.
여명:연화를 찾지 못했다고... 대답했지. 그런데 지금, 연화를 찾는 게 아닌 궁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있구나. (감정이 격해지면 오히려 냉정해진다고 했던가. 지금 제 상황이 그것과 딱 들이 맞는 것 같았다.) 동원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동원해 연화를 찾아라. 그러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나올지 나도 모르겠구나. (무감한 목소리. 말을 끝맺고 궁으로 돌아가고자 발을 옮긴다.)
발길을 옮기는 당신의 뒤로 신하들이 뒤따릅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면...
이제는 익숙한 얼굴과 마주합니다.
예상했나요, 여명?
그래요, 홍월입니다.
홍월:...거, 폐하. 안녕하십니까?
여명:(반갑지도 않은 얼굴에 얼굴이 구겨진다. 괜한 사건에 휘말리기 싫은 탓에 못 본 체하고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홍월:후회하실 텐데... (제 곁을 스쳐지나가려는 네 귀에 부러 들리라는 듯이 큰 소리로 중얼거린다.) 폐하, 제가 재상께 해독제를 먹일 방법을 알고 있대도 저를 외면하실 겁니까?
여명:...해독제? (반사적으로 몸이 굳었다. 당신을 향해 돌아보는 그 얼굴은 차갑다 못해 얼어붙은 것처럼 냉기만을 품고 있었다.) 어디 한 번 들어보지. 대신... 자네의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어야 할 것이야.
홍월:물론입죠. 소인이 이래 봬도 거짓말은 한 번 입에 올린 적 없지 않사옵니까? (이내 제 품을 뒤적거리는 듯하다 병 하나를 꺼내 네게 내민다.) 재상께서는, 반드시 연회에 참석하실 겁니다. 그리고 재상께 들어간 독은 사람을 천천히 말려 죽이는 독이기에 연회가 끝날 때까지는 버틸 수 있겠죠. 이걸 술에 타서 마시게 하면 됩니다.
여명:(미심쩍은 눈으로 홍월을 바라본다. 술에 타서 마시게 하면 된다... 라. 이내 병을 받아들고 제 허리춤에 갈무리한다.) 그래... 믿어보마. 혹시라도, 정말 작은 확률이라도. 연화가 죽을 리는 없겠지? (왜 이것을 홍월에게 물어보는지는 아마 저 또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소중한 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게 될 줄은, 아직은 어린 나이의 그가 어찌 예상했겠는가.)
홍월: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제가 또 굳은 신뢰의 대명사인데... (네 진지한 태도에 비해 퍽 가벼운 태도로 어깨를 으쓱인다. 그러고는 이제 미련 없다는 듯 등을 돌린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그 말을 끝으로 홍월은 어딘가로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여명:(제 걱정이 무색할 만큼 가벼운 태도에 제 기분도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닥 좋은 인상은 아닌 인물에게 이러한 감상이 드는 것이 조금은 우스웠던 건지 헛웃음을 한 번 흘렸다.) ...이만 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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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시간은 흘러 쏜살같이 연회에 참석할 시간에 가까워집니다.
무희들은 꽃처럼 단장하고, 수라간에서는 이틀 동안 혼신을 다해 준비한 음식들을 연회장으로 옮깁니다.
황제인 당신도 평소보다 화려한 옷을 입고 연회장에 참석하면 됩니다.
황제가 연회장에 들어서면 조금은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정리됩니다.
여명, 가장 먼저 무엇을 하나요?
여명:(빨리, 최대한 빨리. 연회를 시작해야겠지. 그래야... 연화의 안위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테니.)
무슨 정신으로 연회를 시작했나요?
온갖 진귀한 음식과 술들이 올라오고, 무희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며 궁중 악단은 성대한 연주를 시작합니다.
화성에서 온 사절단과 설화의 신하가 서로 앉아 나라의 화친을 도모하는 이 장소는 정말로 화려하다 할 수 있을 광경이에요.
흥이 올랐나요? 오르지 않았다면 안타깝군요.
조금 시간이 지나자 연화에 대한 이야기가 올라옵니다.
“어찌 이 귀중한 날에 참석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누가 했는지도 모를 작은 추문에 다른 이들이 동조하기 시작합니다.
신이 내렸다는 천재. 압도적인 천재일수록 꼬리에 달리는 소문들은 추잡스럽고 수치스럽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연화가 당신을 배신하고 옆 나라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듯합니다.
당신은 믿고 있나요?
여명:(헛소리. 얼마나 아둔해야 저따위 소리를 지껄일 수 있을까.)
믿고 있든 믿고 있지 않든. 점점 연화를 향하는 언어의 수위는 강해집니다.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주워 담더라도 처음의 그 맑은 물이 아닐 테죠.
기분이 바닥을 향해 곤두박치려 할 즈음, 다시금 신하 중 하나가 혼인은 언제 하실 거냐며 당신을 재촉합니다.
덧붙여 그들은... 연화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루빨리 그가 가지고 있는 팔다리부터 잘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명부부터 채우시는 것이 어떠냐는 목소리도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옵니다.
여명:(머리가 아프다 못해 터질 지경이다. 당장이라도 패악을 부리고 싶은 걸 허리춤의 해독제를 움켜쥐어 참았다. 지금은... 저치들의 헛소리 따위 듣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나서서 경고하는 것 대신 그들의 얼굴을 제 눈에 새겨넣고 연화를 찾기 위해 황급히 움직인다.)
당신이 막 연회를 박차고 나가려던 그때,
...절대로 열릴 것 같지 않던 연회장의 문이 열립니다.
세상에는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돌아가야 할 곳이 있으며 그곳에서 죽는 것이 가장 값진 죽음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연화에게는 이 궁궐이, 황제인 당신의 앞이, 돌아가야 할 곳인 듯 싶습니다.
늘 가지고 다니던 접선을 한 손에 힘없이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부서지듯이 땅을 밟고 연화는 당신에게 다가옵니다.
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선인과 같다고 생각했던 이가 지금 누구보다 낮은 곳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명:......연화?
소매 끝자락에 보이는 손끝은 독에 영향인지 푸르게 질려있습니다.
연화는 당신의 물음에도 답하지 않고, 당신을 한참이나 부서질 듯 바라보다 이내 무릎을 꿇습니다.
연화:늦어서 죄송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정말로 많지만, 연화는 그마저도 선을 그어버립니다.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서도 연화는 당신에게 충신으로 남을 생각입니다.
정말로. 목숨을 바친 갸륵한 충정이 아닌가요.
당신이 받고 싶은 것도 알지 못하고...
속을 끓일 독에 죽어가는 와중에도 연화의 표정은 평온합니다.
벌을 내려야 한다는 신하들의 대답이 멀리 느껴집니다.
황제가 참석한 연회에 재상이 늦는 것이 작은 죄는 아니겠죠.
그 순간 눈에 술잔이 담깁니다.
술에 타 해독제를 먹이라던 홍월의 말이 머릿속을 울립니다.
...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일까요...
여명, 첫 번째 선택의 시간입니다.
여명:(제 머릿속을 울리는 홍월의 말에 무언가에 홀린 듯 술잔에 해독제를 탔다. 이제 이걸, 연화에게 주면 될 텐데... 의문이 머릿속에 피어난다. 만약 해독제가 들지 않는다면? 만약 이것이 해독제가 아니라면? 아니, 홍월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었지.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술잔을 들고 미동 없이 서있는다. 제 머릿속의 상념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들고 연화를 바라본다.) ...연화, 잔을... (입술을 한 번 짓씹더니, 떨리는 손으로 잔을 내민다.) 잔을 받거라. 마셔줬으면... 좋겠구나.
연화:...벌은 왜 내리지 않으십니까? (힘겹게 시선을 올려 너를 보았다. 텅 빈 시선 끝에 네 손에 들린 잔이 걸린다.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들어 잔을 받아든다. 그 안에 담긴 투명한 액체에 시선을 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독배인가? 그렇다면 제 마음이 한결 편할 텐데.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거나, 지금보다 더한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보다도 사람들이 지금 네 기행이라 무어라 받아들일까 걱정되는 것이 우선이었다.)
마지막 중얼거림을 끝으로, 연화는 당신이 내민 잔을 들고 한참을 멈춰있습니다.
술잔을 든 손을 약하게 떨던 연화는, 고개를 들어 당신을 바라봅니다.
눈앞이 흐린 듯 갈피를 못 잡던 시선은 여명과 정확히 시선을 마주합니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댑니다.
황제가 내린 술잔을 받아마신 신하. 당신이 건넨 술잔을 연화는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매화의 향을 가진 술 안에 섞인 해독제가 연화의 몸속으로 미끄러지듯이 넘어갑니다.
두어 번의 목 넘김은 막힘이 없으며, 곧이어 술잔이 힘없이 연화의 손에서 떨어집니다.
바닥에 맑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 술잔은 도르르 굴러가고, 연화의 표정은 볼 수 없습니다.
한참 동안 무릎을 꿇고 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영의정에 손길에 자신이 본래 앉아야 했던 자리에 앉습니다.
사절단들은 화성에서는 신하의 충을 중요시한다는 말과 함께 오히려 연화에 관심을 보입니다.
다시금 연회가 시작됩니다.
여명:...연화. 몸은, 괜찮은가? (의문문에 해당하는 말이었으나, 분명 설명이나 대답을 요구하는 말은 아니었다. 괜찮을 것이라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은 거였다. 위안에 지나지 않는 말이었다. 대답 따위 아무래도 좋았지만... 당신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것은 온전한 소망이었고 염원이었다. 한 발짝 다가가기만 해도 금세 사라질 것 같아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다가 퍼뜩 정신이 들기를 반복했다.) 대답해주게. 괜찮다고, 그렇게 말해준다면 나는... (나를 절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롯이 당신임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그리 말하며 연화를 살피면, 역시나 약을 먹어서인지 그의 호흡이 한결 편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명:......연화? (하얗게 질린 낯으로 다가간다. 초조한 감정 끝에 찾아오는 것은 절망이 아니길 빌었던가.)
당신이 간절히 이름을 불러도 연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불러볼까요?
여명:연화, 대답하게. 대답해, 연화. (혼란스러운 얼굴로 다가가 어깨를 잡는다. 어느새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떨리는 손이,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계속해서 연화를 부르면, 다른 이들도 연화를 향해 대답하라 종용합니다.
하지만 연화는 생명줄처럼 두 손을 꽉 쥔 채 떨고 있습니다.
표정은 볼 수 없으며,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쥐면, 연화는 당황한 듯이 의자에서 일어납니다.
쿵.
의자가 뒤로 넘어가고, 이내 중심을 잃고 쓰러집니다. 잔뜩 당황한 듯한 낯입니다.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음에도 연화는 아파 보이지 않습니다.
되려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어딘가 두려운 듯 떨고 있습니다.
아니, 웃고 있나요?
흐느낀다는 착각 역시 듭니다.
죽어가는 이가 울며 손을 뻗어 살려달라 하는 것처럼 방향을 모르고 뻗어 나간 손은 여명, 당신을 향합니다.
당신의 손목을 붙든 연화의 손에는 핏발이 가득 서 있습니다.
어찌나 강하게 붙들었는지 연화의 손톱에 긁힌 피부에서 피가 고입니다.
심장이 빠르게 뜁니다.
누군가에게 공격받았다는 사실에 겁을 먹은 것이 아닌, 그 대상이 연화라는 것에 당신의 심장이 아려옵니다.
하지만 곧이어 한 가지 사실이 떠오릅니다. 황제의 몸에 상처를 낸 이는 반역이라는 것을요.
당신은 연화를 반역자로 몰고 싶나요? 그러고 싶지 않다면 연화를 이 연회장에서 내보내야 합니다.
벌써 연화와 여명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나요.
지금부터는 오롯이 당신의 몫입니다.
정신 차리고, 연화를 바깥으로 내보낸 다음 연회를 이어가세요.
원하든 원치 않든. 연화가 믿고 씌워준 면류관을 받아든 이상 당신이 끌어안아야 할 일입니다
여명:(심장이 조이는 느낌에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린 그가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한다. 해결해야 한다. 해결해야 해.) ...재상의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보구나. 영의정... 아니, 무화. 재상을 데려가 쉬게 해줄 수 있나? (완벽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무화에게 부탁하는 게 좋겠지. 걱정스러운 듯 연화를 바라보며 상처가 보이지 않도록 등 뒤로 숨겼다.)
당신의 부탁에 무화가 다가와 연화를 데리고 나갑니다.
눈치 빠른 집박이 박을 한번 쳐 음악의 시작을 알립니다.
흥겨운 연회의 음악이 다시 한번 울려 퍼지고, 다시 한번 궁녀들이 부지런히 술을 나르며 가면을 쓰고 칼을 든 무희들이 검무를 펼치면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차츰 풀려나갑니다.
...그리고 무희들의 무대가 한창 절정에 다다랐을 때.
여명은 문을 열고 소리 없이, 그러나 다급하게 다가오는 무화를 발견합니다.
무화는 무희들에 검무에 집중된 시선들을 피해 여명의 곁으로 다가와 초조하게 속삭입니다.
무화:도주하셨습니다.
무화는 연화가 자신에게 부축 당하는 내내 겁에 질린 듯 떠는 가 싶더니, 곧이어 자신을 뿌리치고 어디론가로 뛰어갔다 전합니다.
급하게 뒤따라갔지만 겁에 질린 상태에서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자신을 따돌렸다고요.
그러고는 품 속에서 도망치던 자리에 떨어져 있었다는 열쇠를 건내줍니다.
이 열쇠가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겠나요, 여명?
여명:...상자...... 궤짝?
맞습니다. 연화의 자택, 그곳 장롱 안에 궤짝 하나가 숨겨져있었죠.
직접 갈 건가요, 여명? 혹은 무화에게 부탁하나요?
어찌 되었든 지금으로서는 작은 힌트가 될 무언가라도 붙잡아야 하지 않나요.
여명:(대놓고 자리를 비운다면 금방 들킬지도 모른다. 차라리 누군가가 제 역할을 대신해준다면...) ...무화야,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내 자리에 앉아 있어 줄 수 있겠느냐?
무화: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네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때에 맞추어 연극을 하려는 건지 연회장에 조명이 탈을 쓴 배우들이 나간 곳을 제외하면 일순간 전부 꺼집니다.
적어도 반 시진 정도는 자리를 비울 수 있겠어요.
여명:(무화의 대답에 제 붉은 도포를 무화에게 넘긴다.) 입고 있거라. 반 시진 정도 걸릴 것이니 편하게 있어도 된다. (대답도 듣지 않고 연화의 자택으로 향한다. 잊지 않도록 열쇠를 손에 꾹 쥐고.)
여명은 연화의 친가로 가는 길에 연화의 신발을 발견합니다.
아마도 자택으로 간 것 같아요. 운이 좋다면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연화의 집에 출입하면, 연화는 없고 장롱문이 활짝 열려있습니다
장롱 안에 궤짝을 찾았지만 열지는 못한 것 같아요. 자물쇠를 부수려 한 듯 궤짝에는 핏자국이 묻어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나요?
여명:(...연화는 이걸 열려고 했던 건가. 굳은 낯으로 궤짝을 더 살핀다.)
인제 보니 나무로 만든 흔한 궤짝이 아닌 금속으로 만들어낸 금고에 가깝습니다.
어쩐지 무겁더라니 싶었어요. 열어보나요?
여명:(열쇠로 궤짝을 연다.)
열어본다면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비스듬하게 들어있는 램프입니다.
정체 모를 노인에게서 받은 정체 모를[램프]가 말이죠.
아마 연화가 이곳에 보관한 듯 합니다.
이것이 무엇이길래 이런 곳에 보관하는 걸까요...
여명:...왜 이걸... (궤짝 안에 보관할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라는 건가? 이해하기 힘든 듯 램프를 한 번 보더니 궤짝을 다시 살핀다.)
[어떻게 불을 붙이는 지 모르겠다. 위험한 물건인 듯 싶어 그분에게서 재빠르게 떼어놓았다. 그러다 문양이 잘 안 보여 문지르자 연기가 새어 나왔다. 그 연기를 마시니 눈앞에 그때 그 시절의 내가 보였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던 그때. 무의식적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 풍경에 손을 뻗었을까 복사꽃이 만져져 매우 놀라 물러났다]
여명:이걸 왜, 아직도... (물밀듯 밀려오는 어릴 적의 기억에 그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심장이 고동치는 게, 마음이 울렁거리는 게. 이걸 무어라 불러야 할지... 연화, 자네라면 알 수 있겠나? 자네라면, 이 감정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나?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응망하던 그가 다시금 램프를 살핀다.)
램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그것을 문지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램프를 문지르나요, 여명?
여명:(쪽지에 적혀있던 대로, 문양이 있는 부분을 문지른다.)
램프를 문지른다면 희뿌옇기도 하다가 붉은색, 검은색, 푸른색으로 일렁거리던 연기를 들이마시면 아찔한 기분과 함께 머릿속으로 채 담을 수 없는 환영들이 지나갑니다.
환각을 지금 치우지 않아도 좋습니다. 적어도, 지금 저 발작을 진정시킬 수만 있다면 무슨 방법을 써도 괜찮을거에요.
그 순간 머리속을 스쳐지나갑니다.
각을 지우지 않아도 좋다면.. 잠시 덮어버리는 걸로 시선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연화는 인간이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있습니다.
여명:...덮기만 해도 된다면...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그가 연화의 양 볼을 잡고 제 입술을 맞붙였다. 혹시나 환각이 자꾸 눈에 걸리는 것인가 싶어 연화의 눈 위로 큰 손 덮어 가리며 고개를 틀었다. 말랑한 입술을 가볍게 씹은 그가 찬찬히 연화에게서 멀어지자 둘의 입술 사이에 긴 은사가 늘어진다.)
연화:(벌어진 잇새로 미끄러지는 혓덩이가 달큰하다. 양 볼에 와닿은 온기 위로 제 손을 겹쳐올리고 눈을 느리게 깜빡이면, 네 손바닥을 간질이는 속눈썹의 움직임이 여실히 느껴졌다. 늘어지는 은사는 갈무리할 생각도 못 한 채 조용히 숨을 죽이다 느릿한 손짓으로 네 손을 떼어낸다.) ... 폐하.
나지막한 목소리가 담담히 당신의 이름을 읊으면, 곧이어 초롱에서 흘러나오던 연기가 서서히 거둬집니다.
그리고, 연화의 눈에 잠시간 돌아왔던 조금의 총기가 사라집니다.
바람 앞 등불처럼, 호수 위 촛불처럼, 그리고 새벽의 안개처럼...
연화:... 명아.
나 사실 네 마음을 알고 있었어.
모른 척해서 미안해.
...과분하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포기하려다가도 나 이상으로 널 잘 아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그래서 일부러 더 숨겼나 봐. ... ...욕심부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천재의 탈을 벗은 인간이 후련한 듯 웃습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웃은 이가 곧이어 몸을 뒤로 기울입니다.
물 안으로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정말 빠른 일입니다.
여명, 그 찰나에 연화를 향해 손을 뻗었나요?
연화의 머리 끝이 손끝에 감겼다 이내 물 속으로 사라집니다.
크지도, 얕지도 않은 소리와 함께 당신이 사랑하던 이는 물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려 하는 이를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여명:여, 연화...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당신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뻗었던 손이 아래로 추락한다. 드디어, 마음이 통했다고... 지난한 시간이 머릿속을 스친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황제는 나야. 내 뜻대로 흘러가야만 해. 주먹을 두어 번 쥐었다 핀 그가 망설임 없이 호수로 뛰어든다. 어릴 적 그랬듯이.)
숨구멍으로 들어오는 물의 감촉을 느낍니다.
구하고자 하는 이를 찾기 위해 눈을 뜬다면 아래로 가라앉는 화려한 옷가지가 보입니다.
그곳으로 헤엄쳐갈수록 당신은 한가지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립니다.
아 그래요. 시간이 풍화에 갈라지도 흐려져도 기억이 사라지나요.
모든 광경을 본 후에도 책에 쓰여진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았던 감각이 비로소 현실로 다가옵니다.
이 곳이 그토록 익숙했던 그 이유.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당신은 스스로 물에 들어갔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나는 돌고 돌아 결국엔 당신일걸 미리 알고 뛰어들었나봅니다.
당신이 돌아가야 할 곳이 나였듯이 여명 역시 돌아가야 할 곳은 연화의 곁이었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아무리 돌아도 당신은 당신이며 나는 나로 이 자리에 호흡하는 겁니다.
부족한 호흡을 가다듬고 화려한 옷자락을 쥐었습니다. 숨이 부족한 듯 조금씩 나오던 공기 방울이 점점 멎어가고 있습니다.
여명:(당신의 얼굴을 잡고 다가갔다. 입술을 겹치고 제 숨을 불어넣으며 다시금 위로 발을 구른다.)
연화의 입 안에서는 아직도 매화주의 향이 남아있습니다.
맞댄 입술에서 서로의 호흡이 섞이고 입술을 떼면 연화가 정신을 잃은 채 늘어져있습니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아요.
하지만 여명은 시야가 캄캄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더이상 올라가기 버겁다 느껴지는 순간 연화가 여명을 붙잡아 수면 위로 올라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폐 안에 공기가 차오릅니다.
아직도 두려움에 사로잡힌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연화가 여명 당신을 차가운 물 속에 버려둘 위인이던가요.
한참 동안이나 몸속의 물을 전부 뱉어내고 나면 연화는 충격에 빠진 듯한 눈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자기가 당신을 얼마나 흔들었는지는 하나도 모르는 눈빛이군요.
마지막까지 그렇게 고백하고 가는 게 어디있나요...
그러고 보니 지금은... 청혼이라던가... 아니면 마음을 전하기... 꽤나 좋은 분위기 아닌가요?
나름 입맞춤도 했잖아요? 방해할 요소도 없이 조용합니다.
못 들었다고 회피할 수 없다는 뜻이예요.
연화의 뺨을 타고 물방울 몇가지가 떨어집니다. 풀벌레들도 조용해요. 평화로운 고요입니다.
여기에서 연화가 당신의 마음을 받아준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연화와 함께 황제와 그의 반려로 살아갈 수 있겠죠.
하지만 황제는 사랑만을 추구할 수 없는 위치입니다.
만약 그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연화와 함께 먼 곳으로 떠날까요?
모든 것을 버리고 연화만을 선택할 수 있나요?
그것도 싫다면, 더 이상 연화와 엮이고 싶지 않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연화를 붙잡는다고 해도, 연화가 언제 이렇게 불안정하게 변할 지 몰라요.
아무리 사랑은 서로를 의지하는 거라고 해도, 이렇게 아픈 것이 사랑이라면, 이렇게 까지 슬프고 붙잡고 매달려야 쥘 수 있던 것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당신에 마음에 차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나요?
연화는 그 어느때보다 깊은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신은 저 눈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하는 말에 무조건적으로 따르겠다는 말을 연화는 입이 아닌 눈으로 속삭였습니다.
선택은 오로지 당신의 몫입니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선택의 시간입니다, 여명.
여명:......내가 싫어져서, 그래서 물에 빠져 죽으려고 했었던 건가?
연화:(물음을 잠시 곱씹다가, 희미한 웃음을 터트린다. 그대로 부서지는 음성을 내뱉는다.) 단 한순간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어.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여명:그렇다면 대체 왜, 왜 죽으려고 한 건가? (당신이 그렇게 웃어버리면, 더 이상 원망조차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당신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았다.) 죽으려 하지 마세요. 책사를 때려치워도 좋고, 나와 국혼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떠나지 마세요, 제발...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이 이상 얼마나 더 여명은 연화에게 끌려다녀야 하는 건가요.
얼마나 더 이 이유 모를 헌신과 소유욕에 잠겨 휘둘려야 하는 걸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연화가 당신을 위해서 몸 속을 잠식하는 광기를 사랑의 형태로 비틀렸듯이
이 모든 뒤섞인 감정의 그릇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저, 완성해야 할 대상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으로써 곁에 있고 싶었을 뿐입니다.
당신의 말이 고해지자 연화의 눈에서는 눈물이 차오릅니다.
그는 때때로 이 세상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말을 들은 황제처럼 웃다가도, 저 밑바닥에서 구원으로 인해 다시금 숨을 얻은 죄인처럼 울었습니다.
연화 본인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감정의 소용돌이...
하지만 그 모든 표정이 행복을 뜻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거절이라 할 수 있을까요.
여명은 비로소, 연화를 연화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신이 내린 천재도, 당신의 책사도, 이 나라의 재상도 아닌 당신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바보같던 사람이었습니다.
연화:...당신을 완성시키려고 했어.
당신은 그 자체로도 이미 완벽해서 나의 손이 닿지 않아도 태양과 같은 사람이었는데...
감히 자신의 손으로 구원을 돌려주고 싶었다 고하는 이의 모습은 볼품없습니다.
얼굴 위 표졍으로 만들어낸 가면으로도 모자라 접선으로 입을 가려 당신에 대한 마음을 숨기고 싶었다는 이 멍청한 사람은.